2024년 4월 29일(월)

해외서 먼저 알아봤다, 소외된 이웃 위한 첨단 기술

테크 스타트업 트렌드

점자 스마트워치, 휴대 검안기 등
영국·독일 등에서 기술력 인정
장애인, 제3세계… 시장 진입 늘어

“현재 몸상태는 어떠신가요?”

담당 의사로부터 PC 채팅 메시지가 왔다. 모니터 상단 키보드 옵션에서 한글, 영어, 기호 중 ‘한글’을 주시하자 한글 자판이 나타났다. ㄴ, ㅔ. 한글 하나하나를 눈으로 쳐다볼 때마다 글자가 하나씩 완성됐다. “네, 지금 아주 좋습니다.” 사지마비 환자들도 눈의 움직임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시선-뇌파 기반 인터페이스(Eye-Brain Interface·이하 EBI)를 개발하고 있는 스타트업 ‘룩시드 랩스(Looxid labs)’의 원격 의사소통 제품 ‘루시(Lucy)’를 통해서다. 눈의 움직임과 뇌파 정보에 머신 러닝(컴퓨터가 스스로 학습해 인공지능을 향상시키는 방법) 기술을 활용해 개인의 인지 상태가 분석된다. 긴급 상황에는 뇌파 측정을 통해 생각만으로 보호자를 호출할 수 있는 시스템도 도입했다.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사지마비 환자 5명에게 테스트도 완료했다. 룩시드 랩스 남재현 CSO는 “사용자 피드백에 따라 더 정교하게 설계해 7~8월쯤 완제품을 내놓을 예정”이라며 “출시 가격 목표는 200만~300만원 선”이라고 밝혔다. 현재 아이 트래킹(eye-tracking·시선 분석) 기술로 만들어진 안구 마우스 가격은 500만~1000만원선. 4분의 1 수준으로 가격을 낮췄다. 지난 17일에는 승일희망재단과 루게릭 환우를 위한 인터페이스 개발 사업 MOU를 체결했다.

◇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는 테크 스타트업들, 첫 고객은 ‘장애인’

기술이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알파고의 승리 이후, 첨단 기술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VR),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AR), 머신러닝, 랩온어칩(Lab on a chip·손톱만 한 크기의 칩 하나로 실험실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 바이오 칩) 등 최첨단 기술을 활용한 스타트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룩시드 랩스도 그중 하나다.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 박람회인 CES에서 룩시드 랩스는 ‘10대 스타트업 아이디어’와 ‘8대 차세대 기술’에 선정되면서 해외 언론에 먼저 소개됐다. 룩시드 랩스의 창업자는 카이스트에서 전산학과 뇌공학 석·박사를 전공한 채용욱(34)씨. 그의 기술력을 알아본 엔젤 투자사는 1억원을 초기 투자했고, 이어 중기청의 기술 창업 지원 프로그램 팁스(Tech Incubator Program for Start-up·이하 TIPS)에 선정되며 5억원 자금을 모았다. 그는 “기술을 통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지마비 환자들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길 바란다”고 밝혔다. 국내 사지 마비 환자 수는 2만여명이지만, 미국에는 600만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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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시드 랩스’ 팀원들이 뇌파 기반 인터페이스를 적용한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다 / 룩시드 랩스 제공

한국 스타트업 ‘닷(dot)’도 전 세계 시각장애인을 타깃으로 한다. 닷의 대표 상품은 점자형 스마트워치. 무게 70g 손목시계형 제품 표면에는 자석으로 만든 점자 핀 30개가 가지런히 배열돼 있다. 이 핀이 나왔다 들어갔다 반복하면서, 시각장애인은 점자로 시간과 문자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왜 하필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마트 시계일까. 창업자인 김주윤(26)씨는 미국 워싱턴대 유학 시절, 보통 책보다 두 배 이상 크고 무거운 점자책으로 공부하는 시각장애인 친구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 사용되던 점자 리더기는 300만원대 정도로 비쌌고, 세라믹으로 만들어져 무겁고 컸다. 김씨는 크기를 줄이고, 가격을 낮춰 휴대성을 높인 점자형 스마트워치 개발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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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자 스마트워치를 개발하는 ‘닷’의 내부 회의 모습 / 닷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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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국으로 돌아온 김씨는 디자이너와 기술자 등 창업 멤버들을 모았고, KBS ‘황금의 펜타곤2’ 창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하며 1억원 상금을 받았다. 이후 중기청 TIPS 프로그램에 선정되며, 동문 파트너스로부터 10억원 후속 투자도 유치했다. 현재 닷은 점자 디스플레이에서 30여개 독점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가격도 290달러(한화 약 34만원)로 기존 보조기기의 10분의 1 수준으로 낮췄다.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 전시회 ‘MWC(모바일월드콩그레스) 2016’에 선보이며 해외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 덕에 제품 출시 이전에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핀란드, 독일 등 15개국에서 150억원 규모 선주문을 받았다. 한국의 시각장애인 수는 30만명이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3억명이 넘는다. 제품 양산을 앞두고,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다. 지난 13일에는 시각장애인들 대학생 10여명을 초청해 사용자 피드백도 받았다. 닷의 최아름 팀장은 “한글 점자뿐만 아니라 영어용 제품도 동시에 개발하고 있다”면서 “8월에는 한국, 9월부터는 해외에서 베타테스트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전 세계 인구 40억, 경제 규모 5조달러 BOP 시장에 주목하라

“이 손톱만 한 조그만 칩에 실험실이 들어간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 기술을 ‘랩온어칩(lab on a chip)’이라고 해요. 반도체가 처음 나왔을 때, 이게 어떻게 역할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됐죠? 하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하죠. 이 칩이 저개발 국가에 들어가게 되면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선진국의 실험실과 기술이 필요한 곳은 다름아닌 제3세계거든요.”

말라리아 진단 키트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노을(NOUL)’의 공동 대표 임찬양(38)씨의 말이다. 공동 창업자인 서울대 전기정보공학과 동기 이동영(38)씨의 아프리카 말라위 봉사 활동이 창업 계기가 됐다. 이씨가 경험한 아프리카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말라리아와 같은 감염 질병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의료 인력이 뒤늦게 투입돼도, 하루에도 열두번 전기가 나가는 곳이라 제대로 된 치료가 어려웠다.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의공학 박사 학위를 딴 이씨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바이오 분야에서 각광받고 있는 ‘랩온어칩’ 기술. 의사나 약사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질병 감염 여부를 알고 약을 처방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는 “감염 질환이 퇴치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쉽고, 빠르고,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면서 “진단 키트를 현지에 보급하는 것만으로도 1차적인 해결 방안이 마련된다”고 했다. 전 세계 인구 40억, 경제 규모 5조달러(약 5922조원)의 BOP(Bottom of Pyramid·소득 피라미드의 맨 하부에 있는 소비자들)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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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의 공동대표 임찬양씨(오른쪽) 이동영씨(왼쪽)

헬스케어 관련 전문 투자자였던 임씨와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바이넬랩 연구원 이씨를 비롯해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전문가까지 10년 이상 베테랑들이 창업 멤버로 모였다. 지난 3월, 1차 시제품을 완성했다. 이 키트는 모바일 기기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으며 말라리아 이외에 결핵, 메르스 등 다른 질환과 관련된 진단 키트도 적용할 수 있다. 노을은 지난해 말,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창의적 가치 창출 프로그램(이하 CTS)’에 선발돼 3억원 펀딩을 받아 본격적으로 시제품 개발에 나섰다. 이들은 “기술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글로벌 펀드나 WHO 등 국제 NGO를 통해 시장을 넓혀갈 것”이라고 했다.

초고가 안과 장비 시장에 ‘휴대용 검안기’로 도전장을 내민 기업가도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나홀로 미국 유학을 떠난 김종윤(27)씨가 주인공이다.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에서 광공학을 전공한 김씨는 광학 연구소에서 시과학 분야 연구를 했다. 우연히 미국에서 소외 계층을 위한 안과 보건 사업에 참여한 게 계기였다. 김씨는 “기존의 거대한 검안 장비는 운반도 어렵고 가격도 너무 비쌌다”면서 “간단한 검안만으로도 안(眼) 질환을 막을 수 있는 경우가 많기에 보급이 쉬운 휴대용 검안기를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크기는 10분의 1 정도고, 최대 5초 안에 측정이 끝난다. 원격진료가 가능한 미국에서는 오비츠 기기를 활용하면 병원에 가지 않고도 시력 장애를 조기 진단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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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츠의 김종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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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츠는 방글라데시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현지에서 휴대용 검안기를 사용하는 모습/ 오비츠 제공

전 세계적으로 시력에 문제가 있는 인구는 약 45억에 이르는데, 그중 80%는 사전 검진만 제대로 받았어도 예방이 가능하다. 김씨는 2013년 11월, 광학 분야 전문 교수, 엔지니어, 비즈니스 전문가 등 멤버 5명으로 팀을 꾸려 미국에 법인 ‘오비츠(o-vitz)’를 설립했고, 지난해에는 한국 법인도 세웠다. 지난해 말, 오비츠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CTS 프로그램에 선정, 1년간 방글라데시 지역 안보건 강화 사업을 위한 자금과 현지 인프라를 지원받고 있다. 김씨는 현재 상용화 수준에 대해 “마무리 점검 및 검증 단계”라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밝게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기업의 목표”라고 밝혔다.

테크 스타트업 전문 투자사인 ‘퓨처플레이’의 류중희 대표는 “시장 진입 단계부터 장애인, BOP시장 등 특정 고객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사업을 펼치는 영리한 기업가들이 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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