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경보 못 듣고 불길도 못 봐”…장애인 재난 통계의 빈틈

“독거노인과 묶인 예산 분리하고 중증장애인 전용 예산 증액 필요”

화재경보를 듣지 못하고 연기나 불길도 보기 어려운 시청각장애인에게 응급상황을 자동으로 감지해 119에 신고하는 장비는 생명과 직결된다. 그러나 예산 부족으로 서비스를 신청하고도 1년 넘게 기다리는 사례가 발생하자, 중증장애인 전용 예산을 별도로 편성하고 지원 규모를 늘려달라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제기됐다.

시청각장애인 당사자인 박관찬 박관찬스토리센터 대표는 지난달 28일 국회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에 ‘장애인 응급안전안심서비스 예산 독립 편성 및 증액 요청에 관한 청원’을 공개했다. 청원 동의 기간은 오는 28일까지다.

이번 청원은 박 대표가 청원인으로 나서고, 아산나눔재단의 사회혁신 리더 양성 프로그램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 15기 참가자들로 구성된 ‘핸즈온(Hands-on)’팀이 공동 기획했다.

◇ 시청각장애인 87% “재난 경보 인지 어려워”

보건복지부가 2020년 실시한 ‘시청각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시청각장애인의 87%는 재난 등 응급상황을 알리는 경보를 알아차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53%는 혼자 힘으로 대피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시각과 청각에 중복 장애가 있는 사람은 화재경보기 소리나 불빛을 인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위험을 알아차리더라도 직접 119에 신고하기 힘들 수 있다. 발달장애인 등 경보의 의미를 이해하거나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운 중증장애인도 비슷한 위험에 놓인다.

박 대표는 청원문에서 늦은 시간 홀로 사무실에 있다가 타는 냄새를 맡았던 경험을 전했다. 그는 “경보가 울려도 들을 수 없고 어디서 불이 났는지 볼 수도 없었다”며 “뜨거운 열기와 불길이 피부에 직접 닿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 12년간 지원받은 중증장애인 1만2734명…신청 후 1년 이상 대기도

‘응급안전안심서비스’는 독거노인과 중증장애인의 가정에 화재감지기, 활동량감지기, 응급호출기 등을 설치하고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119에 자동으로 신고하거나 응급관리요원에게 알리는 정부 사업이다. 화재나 낙상 등 위험을 스스로 인지하거나 신고하기 어려운 사람을 24시간 감지·연결하는 안전망이다.

청원에 인용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응급안전안심서비스 사업이 시작된 2013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서비스를 지원받은 중증장애인은 전국 누적 1만2734명이다. 이 가운데 서울 지역 지원 인원은 2058명이다.

현장에서는 서비스를 신청한 뒤 장비를 설치받기까지 1년 이상 기다리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청원 측은 “재난은 서비스를 받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며 장기간 대기가 장애인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한다고 지적했다.

대기가 발생하는 배경으로는 독거노인과 장애인이 하나의 사업 예산으로 묶인 구조가 지목됐다. 응급안전안심서비스 전체 이용자 약 27만8000명 가운데 장애인은 5% 미만이다. 노인 이용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조에서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장애인의 수요가 예산 배분과 신규 장비 보급 과정에 충분히 반영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장애인만을 대상으로 응급안전안심서비스를 운영하는 서울에서도 신규 장비 보급 예산이 부족해 대기가 발생하고 있다. 청원 측은 이에 따라 독거노인 사업과 장애인 사업의 예산을 분리하는 것과 함께 장애인 대상 예산 총액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사고 적은 게 아니라 신고조차 못 했을 가능성”

청원문에는 장애인 재난 피해가 공식 통계에 충분히 포착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위험을 인지하거나 직접 신고하기 어려운 장애인은 사고가 발생해도 구조를 요청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원 측은 이러한 ‘다크 넘버’로 인해 실제 위험이 통계에 드러나지 않고, 장애인 재난 안전이 정책과 예산의 우선순위에서도 밀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크 넘버는 실제 사건이 발생했지만 신고되거나 집계되지 않아 공식 통계에 나타나지 않는 수치를 의미한다.

박 대표는 “화재를 인지하지도, 구조를 요청하지도 못한 채 사라져간 생명과 지금도 기약 없는 대기표를 쥐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을 방치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청원인은 국회에 ▲독거노인과 함께 편성된 응급안전안심서비스 예산에서 중증장애인 전용 예산을 분리해 편성·관리할 것 ▲서비스 대기 수요를 해소할 수 있도록 중증장애인 전용 예산 총액을 확대할 것을 요청했다.

핸즈온팀은 청원이 끝난 뒤 청원문과 장애인 전용 예산 신설·증액 방안을 담은 정책제언서를 오는 11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실에 전달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가장 취약한 사람이 안전한 사회가 진정으로 모두가 안전한 사회”라며 국민의 동참을 요청했다. 청원은 오는 28일까지 국회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에서 본인 인증을 거쳐 참여할 수 있다.

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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