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목)

[Z의 휠체어] 전통과 장애의 공존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유지민

지난해 말 가족들과 서울 종로구 익선동에 놀러 갔다. 익선동은 볼거리, 놀거리, 먹을거리들이 가득한 소위 ‘핫플레이스’다. 근방에 창덕궁, 경복궁, 운현궁이 있고 거리 곳곳에 한옥 식당, 카페, 상점도 많다. 그러나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많은 가게를 앞에 두고도 하염없이 거리를 걷기만 했다. 과거와 현대의 멋이 공존하는 한옥은 장애인에게 ‘그림의 떡’ 같은 존재이다.

초등학생 시절 체험학습으로 궁에 가는 걸 싫어했다. 애초에 계획 단계부터 배제당했다. ‘어차피 가기 힘드니까’라는 말로 시작하는 문장을 수십 번 들었다. 어찌어찌 가더라도 관람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건물을 둘러보고 설명을 듣는 동안 가만히 기다리기 일쑤였다. 그냥 집에 보내달라고 말하던 어린 마음엔 큰 상처가 남았다.

2020년 8월, 이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SK텔레콤이 AR(증강현실)을 통해 궁을 관람하는 ‘창덕ARirang’을 선보였다. 창덕ARirang 광고에는 휠체어를 탄 아이가 나온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창덕궁에 놀러 갔지만 휠체어 바퀴가 턱에 걸려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어 아이는 스마트폰 앱으로 창덕궁 내부를 관람한다. 이러한 앱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장애인에게도 ‘직접 경험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의 공백은 어떤 기술의 발전도 채워줄 수 없다.

대다수의 한옥은 단차가 높고 내부가 좁다. 대대적인 개조를 하지 않는 이상 휠체어로 가기 매우 힘들다. 궁이나 한옥마을의 ‘준수한 휠체어 접근성’은 보통 내부 이동로와 화장실, 주차장 같은 부가 시설에만 해당한다. 정작 주요 관람지인 건물은 갈 수 없다. 심지어 이마저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들도 많다. 초등학생 때 궁에 반감을 품었던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2022~2026년 문화재 보존·관리·활용 기본계획에 따르면 유니버설 디자인을 통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보편적 향유 환경 조성’을 달성할 것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목표에는 국립고궁박물관 무장애 공간 조성, 궁·능별 편의시설 개선 등이 있다. 그러나 같은 계획의 궁궐 및 왕릉 복원 부문에는 휠체어 접근성 관련 언급이 없다. 무언가 이상한 점이 보이는가? 핵심 문제인 건물 접근성 향상은 고려 대상조차 아니다. 이미 있는 건물을 고치기는 어렵고, 장애인이 관람할 장소를 따로 만들어준다는 방침이다. 앞서 언급한 ‘직접 경험할 권리’가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10월 오픈한 스타벅스 대구종로고택점은 1919년 지어진 고택을 활용한 것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이곳을 방문할 수는 없다. 매장 초입의 대문, 내부 입구를 돌계단과 턱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은 ‘접근성보다 한옥 컨셉을 우선하는 카페의 관행은 차별’이라며 스타벅스 측에 사과를 요구했다. 스타벅스는 “고택을 그대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생긴 장애인 출입 관련 시설의 부족을 점차 보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상업 목적의 한옥 건물조차 장애인에게 불친절하다. 그러나 문화재와 달리 이 건물들은 부분적인 개조가 가능하다. 완전히 휠체어 친화적인 건물을 바라지 않는다. 최소한 장애인을 고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 더 이상 ‘전통을 이어간다’는 명분으로 이뤄지는 차별은 없어야 한다.

국립문화재연구원에 따르면 문화유산의 보존은 ‘문화유산이 지닌 문화적 중요성과 가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원형 그대로의 보존만이 역사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 예시로 일본 도쿄의 센소지 사원을 꼽을 수 있다. 센소지는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임에도 내부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이 엘리베이터는 사원 고유의 모습과 어우러져 마치 건물의 연장선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과거의 양식을 과도하게 해치지 않으면서도 모든 국민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문화가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게 더 친절해지기를 바란다.

유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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