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다협동조합 유경희 이사장
“자취 꿀팁 담은 노트 재능·고민 나누는 아카데미 싱글족의 유쾌한 공유”
‘첫 번째 집을 구하고 나서 뼈저리게 느낀 점. 1 창문 큰 집이 좋은 줄 알았는데 밤새 떠드는 사람들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많다. 2 오랜 시간 공실이었던 방은 좀 더 꼼꼼히 살펴볼 것. 3 수압을 체크할 땐 욕실과 부엌 수도를 동시에 틀어볼 것. 4 창틀이나 이음매에 곰팡이가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 5 안전을 위해 1층보다는 고층이 낫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홍대 골목을 지나 들어선 카페 ‘어슬렁정거장’. 벽 선반에 놓인 흙색 스프링 노트 3권이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카페 ‘방명록’이 아니다.’쉐어링노트(Sharing Note·공유노트)’란 이름답게, 혼자 사는 자취생들의 ‘꿀팁(Tip)’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스마트폰 소액 결제 사기 대처법, 새송이버섯 피클 만드는 법, 주말 외국어 스터디 모집 글 등 생활 정보가 가득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님들이 알아서 선반에 놓인 노트와 색연필을 가져다가 페이지를 채운다.
“1인 가구가 따로 또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소비 패턴부터 건강, 안전, 정서적인 문제까지 혼자이기 때문에 생기는 고민일수록 함께하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많거든요. 생활은 따로 하더라도 이들이 한 지역에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게 바로 지난해 문을 연 ‘어슬렁정거장’이에요.”
유경희(58) 그리다협동조합 이사장이 셰어링노트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국내 첫 여성 1인 가구 협동조합 ‘그리다협동조합’은 한국여성민우회를 거친 활동가 6명을 주축으로 2013년 설립된 단체다. 조합원 120여명 중 70% 이상이 여성 1인 가구다. 지난해 1월 문을 연 카페 어슬렁정거장은 그리다협동조합이 1인 가구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세운 공동체 복합 문화 공간. 현재 예비 사회적 기업이자 마을 기업으로 운영 중이다. “그리다협동조합 창립 멤버 6명 중 저와 총괄본부장을 제외한 4명이 여성 1인 가구입니다. 1인 가구는 이미 전체 가구의 4분의 1 수준으로 증가했고, 앞으로도 점차 늘어날 전망이지만 사회는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오히려 혼자 산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1인 가구의 고민은 사회적 과제입니다.”
실제로 국내엔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싱글족의 경제적 특성과 시사점’에 따르면 2000년 226만 가구(전체 가구 대비 15.6%)였던 1인 가구는 2015년 506만가구(26.5%)로 급증했다. 20~30대 여성 1인 가구 비중도 빠르게 늘어 지난해 절반(50.9%)을 넘어섰다. 1인 가구가 늘었다고 그들의 삶이 풍요로워졌다 여기면 오산이다. 국토부 주거 실태 조사(2012)에 따르면 서울 청년 1인 가구의 69.9%가 소득의 30%를 주거에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 대비 지출률은 82%를 넘는다(한국노동연구원 ‘가계 동향 조사’). 복지나 세제 혜택에서도 이들은 언제나 뒤로 밀려 있다. 암묵적인 차별은 덤이다. 이러한 1인 가구의 고민을 충분히 담은 공간이기 때문일까. 어슬렁정거장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곳을 활용하는 손님들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여름내 개인 텃밭에서 기른 작물이나 시장에서 싸게 구매한 수박 한 통 등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식재료도 모두 이곳에 모인다. 비닐봉지에 나눠 두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는 방식이다. 집을 비우면 받아줄 사람이 없는 택배도 받아준다. 돈은 오가지 않는다. 어슬렁정거장이 하는 일은 그저 이것들이 잠시 머물다 필요한 사람 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는 것뿐이다. 2층 공간에선 ‘어슬렁아카데미’가 열린다. 1인 여성 가구를 위한 강좌다. 지난해 초여름 첫 강의를 시작해 인문학·생태드로잉·사진촬영교실 등 그리다협동조합에서 직접 준비하거나 조합원들의 재능 나눔으로 진행되는 강의가 수시 개설된다. 반응은 뜨거웠다. 이 강의를 듣기 위해 일주일에 네 번 천안과 서울을 왕복하는 수강생들이 나올 정도다.
“직장 상사와의 심한 갈등으로 힘들어하던 분이 있었어요. 생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고, 멀리 사는 가족에게 털어놓자니 걱정만 끼치는 것 같고…. 그런데 여기 와서 수업을 듣는 6주 동안 그분의 표정과 말투가 눈에 띄게 달라졌어요. 자신의 고민을 또 다른 1인 가구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요.”
유료로 진행되는 아카데미 이외에도 특별한 수강료를 지불하면 들을 수 있는 무료 프로그램도 있었다. 지난해 개설된 타로카드 프로그램이 그 예다. 신청서 하단에 ‘교육 후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을 적고 재능나눔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심리 치유 프로그램, 의자를 이용한 성인 발레, 요가, 반찬 만들기, 코바늘 뜨기 등 다양한 재능이 수강료를 대신했다. 12회기의 무료 교육이 추가로 진행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후기 모임도 이어지고 있다. 어슬렁아카데미를 통해 모인 5명의 수강생은 ‘동네 친구’라는 소모임을 결성, 1인 가구의 심리·신체적 건강을 주제로 ‘1인용 행복’이라는 미니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1인 가구도 행복한 동네를 만들어가는 것이 목표”라는 유 이사장. 그는 “마포구의 다양한 협동조합과 함께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가고 싶다”며 1인 가구에 대한 관심과 응원을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