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필란트로피를 묻다
[AI 시대, 필란트로피를 묻다] 선의에도 킬 스위치가 필요하다

공짜로 인공지능(AI)을 쓸 수 있다면 일손이 부족한 비영리기관에는 반가운 제안이다. 상담 기록을 정리하고 신청서를 분류하는 일을 덜 수 있으니, 그만큼 주민을 만날 여유도 생길 것이다. 나 역시 이런 기술 기부가 현장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다만 받는 입장이라면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멈출 수 있는가. 설명을 위해 가상의 지역 복지기관을 떠올려보자. 한 기업이 상담 기록을 요약하고 지원 신청서를 분류하는 시스템을 무료로 제공한다. 직원들은 반복 업무를 줄이고 주민을 만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주민이 지원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직원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주민에게는 사람의 재판단을 요청할 통로도 없다. 이후 이용료가 올라 다른 시스템으로 옮기려 하지만, 필요한 기록을 가져가기도 어렵다. 무료로 받았던 도구가 오히려 기관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다. 공익을 위한 자발적 나눔과 실천인 필란트로피를 나는 이 지점에서도 평가하고 싶다. 현장에 필요한 도구를 건넸는지뿐 아니라, 현장이 그 도구의 판단을 거부하고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지도 살펴보자는 것이다. 선의로 시작한 지원도 받는 쪽의 선택권을 좁힐 수 있기 때문이다. ◇ 무료 이용권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문제는 도입을 결정한 뒤에야 눈에 띄기 쉽다. 미국 존슨센터는 2024년 발표한 분석에서 저가·무료 인공지능 도구가 늘면서 기술 도입의 문턱은 낮아졌지만, 이를 책임 있게 활용하기 위한 시간과 조직 역량이 중요해졌다고 진단했다. 내 관심은 그다음에 드는 비용에 있다. 결과를 검토할 사람과

[AI 시대, 필란트로피를 묻다] 기술은 나눔을 돕는 수단

그리스어로 ‘인간 사랑’을 의미하는 필란트로피는 단순히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베푸는 자선만을 뜻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사회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돈과 재산뿐 아니라 시간·지식·기술·관계망을 자발적으로 내어놓으며 공동체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공공적 실천이다. 따라서 필란트로피의 핵심은 기부액의 크기보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 타인에 대한 연대, 그리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시민의 믿음에 있다. 한국 근대의 기부문화와 시민정신도 이러한 과정에서 성장했다. 1896년 독립문 건립 모금은 신분과 지역을 넘어 시민들이 공공의 상징물을 함께 세운 근대적 모금운동의 최초 사례였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이재민을 돕기 위한 모금은 국경과 민족을 넘어 고통받는 타인을 돕고자 한 인도주의적 실천이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는 상인·노동자·농민·학생·여성 등이 나라의 위기를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참여했다. 이후 기부문화는 민립대학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재해와 기근 구호, 한센병 환자 지원, 해외 한인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 등으로 영역을 넓혀 갔다. 이 과정에서 기부는 개인의 선행에 머물지 않고 시민을 조직하고, 공동의 목적을 형성하며, 필요한 제도를 만들어 가는 힘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권력은 우리 민족의 자발적인 필란트로피 운동을 탄압하고, 전쟁을 위한 국방헌납과 같은 비자발적 모금을 강요했다. 광복 이후에도 독재 정부는 일제가 시행하던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필란트로피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에 이르러서였다. 역사를 돌아보면 필란트로피 운동에는 신문과 언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립문 건립 당시에는 독립신문이, 국채보상운동 때는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만세보·제국신문 등이 사회문제를 알리고 모금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시민들의 참여 방법을 안내하는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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