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아가면서 좋은 인연을 만나기 마련이다. 평생 연기자의 삶을 살아가다 보니 선후배 동료 배우와 스태프, 수많은 팬까지 매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워낙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기에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어렴풋하게만 기억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바로 어제 만난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되는 사람도 있다.
1999년 이른 봄이었다. 이름도 생소한 한 NGO가 친선대사 제의로 찾아왔다. 그때만 해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단체였지만, ‘한국인의 힘으로 세계 곳곳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라는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선뜻 친선대사 자리를 승낙했다. 무엇보다 몇 마디 기관 소개에서 느껴지는 자부심과 당당함에 더욱 믿음이 갔다.
당시 창립 8주년을 맞은 굿네이버스는 국내외 사업을 통해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친선대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국내 사업장에 방문할 기회가 많았는데, 우리 주변에도 학대와 빈곤 등으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사업 현장에서 아이들의 다양한 아픔과 현실을 맞닥뜨리고 보니 당장 몇몇 사람의 나눔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기자로서 왜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눔’을 알려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졌다.
그해 10월 방글라데시로 첫 해외 봉사활동 떠나게 됐다.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의 눈빛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굿네이버스 사업장이 위치한 곳은 수도 다카의 최대 빈민가 지역으로 평소 TV나 신문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이었다. 빈민가의 한 학교에 학용품을 나눠주기 위해 방문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폐허 속에서도 꽃이 피어나듯 학용품을 받아 든 아이들이 저마다 꿈이 담긴 듯한 눈망울로 나를 향해 밝게 웃고 있었다.
그 후로도 네팔, 탄자니아, 니제르 등 개발도상국에 방문할 때마다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마주하곤 했다. 한국의 1960년대. 불과 몇 십년 전 우리나라의 과거가 그들의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의 전환. 그 역사의 변곡점에서 대한민국 토종 NGO 굿네이버스가 시작된 것처럼 지금은 비록 절망뿐인 현실일지라도 언젠가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뀔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저버릴 수 없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국내에도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은데 왜 해외까지 도와줘야 하는지. 분명한 건 개발도상국 아이들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0년 탄자니아로 봉사활동 갔을 때의 일이다. 여섯 살 정도 된 여자아이가 맨발로 천진난만하게 뛰어와 ‘신발 하나만 사 달라’고 하는데 가슴이 미어졌다. 아이의 작은 발은 상처투성이였고, 태어나 한 번이라도 신발을 신어 본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굳은살이 깊게 배어 있었다. 결국 왈칵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겨우 참아냈다.
빈곤, 내전, 기후변화 등으로 여전히 전 세계에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많고 변화의 속도는 더디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다행인 건 세상 모든 아이의 미래를 함께 걱정해 주고 응원을 아끼지 않는 좋은 이웃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1991년 창립 당시 8명으로 시작했던 굿네이버스는 30년 만에 전 세계 59만명의 후원자가 함께하는 글로벌 NGO로 성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어딘가에 굿네이버스를 만나 새로운 꿈을 꾸는 아이들과 좋은 변화를 마주하는 이웃이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고,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다.
지난 2019년 인기리에 종영한 ‘동백꽃 필 무렵’이란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기적은 없었다. 대신 오지랖으로 똘똘 뭉친 우리, 평범한 영웅들의 합심, 착한 사람들의 소소한 선의가 모여 기적처럼 보일 뿐이었다.” 굿네이버스는 30주년을 맞아 후원회를 발족했다. 앞으로 우리 주변의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웃, 굿네이버스의 지역 후원회가 중심이 되어 또 어떤 좋은 변화와 기적을 만들어 나갈지 벌써 가슴이 뛴다. 또 다른 좋은 인연이 시작될 거라는 예감과 함께.
글=배우 최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