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판이 뽑혀 나오는 기계래요. 이걸 보는 순간, 그냥 아빠 생각이 났어요.”
중학생 여자아이는 주루룩 눈물을 흘렸습니다. IMF 때 사업이 망한 아빠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사진 속에는 서울 문래동에서 발견한 기름때 묻은 공장기계가 있었습니다. 아이와 저는 이 작품 제목을 ‘아빠’라고 붙이기로 했습니다. 아이는 활짝 웃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 저와 더나은미래 기자들은 서울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일일강사를 했습니다. 두산 사회공헌 프로그램인 ‘시간여행자’의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청소년 60명은 지난 5개월 동안 사진과 역사를 배우고, 서울 문래동과 부암동 등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내년 1월이면 이 작품은 전시회에 걸리게 됩니다. 저는 아이들이 작품집에 실릴 에세이를 직접 쓰도록 돕는 일을 맡았습니다. 한 아이는 온통 새까만 바탕에 하얀 국화꽃 사진을 대표작으로 골랐습니다. “왜 이 사진을 찍었느냐”는 질문에, 처음에 “그냥 흰 국화꽃이 좋아서요”라고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상처받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제가 1지망으로 원했던 고등학교에 떨어졌어요. 2지망 고등학교 원서를 넣고 오는 길에, 제가 가고 싶었던 1지망 학교에 원서를 넣으려고 깔깔대며 버스를 기다리던 친구들을 만났어요. 속상해서 죽고 싶었어요. 이 꽃을 그 아이들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었어요.”
에세이 제목을 ‘2지망’으로 정했습니다. “네 얘길 써보라”는 말에 아이는 “정말 이 얘길 써도 돼요?”라고 반문하더니, 나중에 멋진 에세이 한 편을 만들어왔습니다. ‘문화역 서울 284′(구 서울역사)라는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도, 전혀 다른 작품으로 탄생했습니다. 어지럽게 엉켜 있는 전선과 콘센트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촬영한 아이는 “지역아동센터 선생님·친구들과 갈등 때문에 지금 폭발 직전”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자신만의 작업실을 가진 디자이너가 꿈이라는 한 아이는 예술작가의 작업공간을 사진에 담아냈습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제 마음엔 묘한 회오리가 일었습니다.
2012년 그야말로 학교 폭력 사건이 최고조에 달한 한 해였습니다. 마음이 아픈 아이들은 많아졌는데, 그들을 돌아봐 주는 손길은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마음병’은 빛의 속도로 퍼져가는데, 처방약은 없거나 오래돼 약효가 없는 것 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단단한 얼음이 아니라, 작은 칭찬과 동기부여에도 쉽게 녹아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은 그들을 믿고 존중해야 합니다.
미국 코네티컷주 초등학교에서 27명이 한 청년의 총기 난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청년의 마음병이 곪아 터질 때까지, 그 어떤 어른도 개입하지 않은 사회는 건강하지 못합니다.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화두로 내년에도 더나은미래는 달려갑니다. 2012년 한 해 동안 도와주신 분들, 모두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