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자칭 프로불편러의 ‘장애인 접근성’ 개선 운동기

“전 프로불편러예요.”

지난달 8일, 서울 성수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혜일(38·시각장애3급)씨는 스스로를 ‘프로불편러(매사에 불편함을 그대로 드러내어 주위 사람의 공감을 얻으려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 지칭했다.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이곳저곳에 ‘장애인 접근성’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란다. 인터뷰가 있던 이날에도, 김혜일(38)씨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점자 신용카드’를 꺼내보였다. 

“카드 위에 새겨진 점자를 통해 결제 정보를 입력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카드를 만들어 주는 금융사는 많지 않죠. 비장애인은 원하는 카드를 마음껏 쓸 수 있는 반면, 장애인은 한 두개의 카드만 평생 쓰는 셈이예요.”

시각장애인이자 웹접근성 전문가인 김씨는 지난 4월 국내 최초로 국내 11개 은행 및 카드사를 대상으로 ‘점자 신용카드’ 발급 실태를 조사해 공개했다. 그 결과 11개 기업 중 8곳이 점자 신용카드를 발급했으나, 대부분 발급 카드 종류는 한정적이었다. ☞웹접근성이란? 장애인, 고령자 등이 웹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

11개 카드사 및 은행의 점자 신용카드 발급 현황. 사진을 누르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김혜일

김씨는 지난 2010년부터 10여년 동안 국내 대기업부터 공공기관에까지 접근성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생기면 목소리를 낸 인물이다. 설득부터 내용증명, 인권위 질의, 민사 소송 등 법적 조치까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가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웹사이트 제작을 거부한 피자헛에게 끈질기게 요구해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웹사이트가 개설됐고, 홈페이지에서 본인인증을 할 때 필요한 ‘캡차(CAPTCHA)’의 그림문자를 읽어주는 음성지원을 모바일 버전에서도 가능하게 해달라 인권위에 진정을 넣은 것도 김씨다. 덕분에 현재 대부분의 본인 인증 모바일 페이지에서도 그림문자가 음성지원 되고 있다. 

홈페이지 자동 가입 방지 등에 쓰이는 프로그램인 ‘캡차’. 스피커 모양이 문자를 읽어주는 기능이다. ⓒ홈페이지 캡쳐

◇“취미로 시작한 홈페이지 제작 덕분에 장애인 웹 접근성 문제 파게 됐죠”

15살 때 원인 불명의 각막혼탁으로 양쪽 시력을 거의 상실한 김씨. 그가 장애인 ‘웹접근성’에 목소리를 낸 계기는 무엇일까. 시작은 컴퓨터에 대한 흥미였다고 했다. 홈페이지 제작이 취미였던 그는 친구들 중에서 제일가는 ‘컴퓨터 전문가’였다. 이 때문에 맹학교 친구들에게 강습 요청이 쇄도했다. 그러나 사용법을 자세히 알려줘도 장애를 가진 친구들은 쉽사리 따라하지 못했고 이내 대다수가 포기했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장애인들도 컴퓨터나 기기를 잘 활용할 수 있을지 연구하기 시작했고, 점점 흥미를 느끼게 돼 대학 졸업 후 관련 회사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접근성 솔루션 개발 일을 하다 보니, 기업들이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데도 안 한다는 걸 느끼게 됐죠. 그래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네이버와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주관한 접근성 노하우 공유의 장, ‘2016 널리(NULI) 세미나’에서 웹접근성에 대해 강연하는 김혜일씨. ⓒ김혜일

김씨는 2010년 화면 낭독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 ‘엑스비전 테크놀로지’에 시각장애인 테스터로 입사했다. 그는 고객 상담부터 직접 프로그램을 시험해보고 피드백을 기록하는 일까지 낭독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웹에이전시의 접근성 사업부, 다음 서비스 접근성팀을 거쳐 현재 카카오가 100% 출자해 2016년 설립한 자회사형 장애인표준사업장인 ‘링키지랩’에서 접근성 향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엑스비전 테크놀로지 재직 중 국내 컴퓨터 백신 개발 회사와 함께 일하다가 시각장애인이 쓸 수 있는 유료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회사에 요구했는데 묵묵부답이었다”면서 “굴하지 않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질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자 시각장애인용 버전의 프로그램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시각장애계의 ‘스피커’다. 네이버 접근성 세미나와 일본에서 가장 큰 웹 제작 관련 컨퍼런스인 ‘CSS NITE’의 한국 행사 등에서 대표 강연자로 무대에 섰다. 지난 10여년 동안 수십 여개의 기업에 시각장애인도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달라며 공식 요청해왔다. 심지어 법적 대응도 서슴지 않으면서 몇몇 기업으로부터는 장애인용 제품을 출시하는 변화까지 이끌어냈다.

지난 5월 8일 성수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혜일씨. ⓒ박민영

◇“장애인도 시민이자 고객… 베푼다는 관념 없어져야”

최근 그의 ‘매의 눈’이 향한 곳은 은행 및 카드사다. 지난 3월 국내 카드사 및 은행 11곳을 상대로 ‘점자 신용카드’를 발급하는지를 조사했다. 점자 신용카드란, 카드번호, 유효기간, CVV, 카드명을 카드 앞면에 점자돌기로 인쇄하여 제공하는 신용카드다. 그는 한 달여 동안 11개 금융사의 홈페이지와 콜센터 등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고객센터와 CS팀 등 공식 창구를 통해 직접 알아봤다.  

“온라인쇼핑, TV홈쇼핑, 핀테크, 간편결제 등 온·오프라인에서 신용결제 서비스가 활성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결제 서비스의 접근성이 좋아지더라도 시각장애인이 신용카드 정보를 직접 확인할 수 없다면 어떨까요? 더구나 신용카드는 개인정보 보안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결국 결제 자체를 못하게 되는 거지요. 시각장애인에게 신용카드의 접근성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확인해보려고 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 11개 기업(▲KB국민카드▲롯데카드▲비씨카드▲삼성카드▲시티카드▲신한카드▲우리카드▲카카오뱅크▲케이뱅크▲하나카드▲현대카드) 중 8곳(▲KB국민카드▲롯데카드▲비씨카드▲삼성카드▲신한카드▲우리카드▲하나카드▲현대카드)이 점자 신용카드를 발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KB국민카드를 제외한 7곳 모두 점자 카드 종류가 한정적이었다.

그나마 하나카드가 4종류의 점자카드를 발급했고 이외 기업은 한 두 종류만 제공했다. 쇼핑, 커피, 식당, 통신 등의 각종 할인 및 제휴된 포인트, 마일리지 등 각종 적립 혜택을 주는 카드 수십 가지를 판매하고 있지만, 시각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점자 카드는 1~2종 뿐이어서 시각장애인의 소비패턴에 맞는 카드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또한 점자 신용카드 발급 안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점자 신용카드를 제공하는 8개 기업 중 롯데카드와 삼성카드를 제외한 6곳이 홈페이지에 점자 신용카드 발급 정보를 안내하고 있지 않았다. 카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콜센터에 직접 전화하는 방법 밖에 없다. 하지만 이마저도 고객센터 직원이 점자카드 존재를 알지 못하면 발급받기가 힘들다고.

KB국민카드의 다양한 점자 신용카드. 개인정보(점자 포함)는 모자이크 처리. ⓒ박민영

“KB국민카드 고객센터에 문의했더니 처음엔 점자카드가 없다고 했는데, 다시 전화 와서는 점자카드 상품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장애인 고객을 비장애인만큼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가 직원들에게 장애인 전용 상품을 교육하지 않은 거죠.”

이뿐만 아니다. 그는 신도림 지하철역사 안에 있는 쇼핑센터에서 점자 보도 블록이 끊어지는 것을 발견, 서울교통공사에 신고를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쇼핑센터가 지하철 역 안에 있지만 사유지라 어쩔 수 없다”는 답변 뿐이었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등 큰 건물 앞 인도에서 갑자기 점자 보도 블록이 끊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현행법상 사유지는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에 대한 의무가 없다. 자연스레 행정기관의 단속과 계도에도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김씨는 “기업이 장애인도 고객이라는 마인드를 가지면 절대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모든 제품, 시설에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라는 것은 무리이지만, 적어도 안전과 생명에 직결이 되는 점자 보도 블록이나, 의약품 점자 표시 등은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장애인도 고객이라는 인식이 기업들에게 정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민영

한국제약협회에 따르면 국내 허가된 의약품 3만 9000여 품목 가운데 점자 표시가 된 품목은 0.2%에 불과하다. 지난해 4월에는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안전상비약과 건강기능식품에 점자 및 음성변환용 코드표시를 의무화하는 약사법 개정안 및 건강기능식품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식품의약안전처 또한 지난해 11월 모든 의약품에 점자표시를 의무화한 ‘의약품 등의 안전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마련하고 한국제약바이오협회 등을 통해 업계 의견을 조율 중이라 밝혔으나 이후 진전은 없는 상황이다. 

“장애인에게도 친절한 사회가 됐음 좋겠어요. 이건 정부나 기업의 의지만으로는 안되죠. 시민들의 관심과 행동 변화가 필요해요. 서로 ‘자발적으로 불편하고 손해보기’요. 나아가 이건 단지 장애인만을 위해서가 아니예요. 노약자, 임산부를 위해 지하철에서 자리를 비워두는 것처럼 나한테 당장 이득은 안되지만 배려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불편을 감수한다면 더 나은 사회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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