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랜드재단X서울시 ‘노숙인 지원주택’ 사업 6년 성과
이정희(69·가명)씨는 20년 이상 여성보호센터와 노숙인시설을 전전했다. 가족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맨몸으로 무작정 집을 나왔지만 사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여섯명이 한방에서 지내야 하는 시설 생활이 불편해 고시원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아 고시원 월세 20만원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온종일 좁은 방안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고립감은 점점 커졌다. 고시원에서 시설로, 시설에서 또 다른 시설로 주거지를 옮겨다니는 과정에서 설상가상 ‘조현병’까지 발병했다. ‘누군가 수급비를 빼내 간다’는 환청이 들렸다.
시설에서 이씨를 도와주던 사회복지사가 ‘지원주택’ 이야기를 꺼냈다. 노숙인에게 집을 주는 제도가 있으니 신청해보라고 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이씨는 지난해 3월 서울 구로구 개봉동에 있는 지원주택에 입주했다. 작은 원룸을 갖게 된 지 1년 4개월. 아침에 일어나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 이웃을 만나 차를 마시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조현병을 조절하는 약도 아침저녁 스스로 챙겨 먹는다.
작은 기적도 일어났다. 시설에 있을 땐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던 친오빠의 연락처가 지원주택에 살면서 기억이 난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휴대폰을 개통해 오빠에게 안부를 전했다. 20년간 해결되지 않던 복잡한 문제들이 ‘집’이 생기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지난 6년간 200여명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다. 서울시와 이랜드재단이 2016년 함께 시작한 ‘노숙인 지원주택’ 사업이 성과를 내면서 노숙인 문제 해결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이랜드재단에 따르면, 지원주택 입주 노숙인의 80% 이상이 정신질환과 알코올 의존증을 다스리며 1~3년 넘게 주거를 유지하고 있다.
노숙인의 문제는 ‘집’이 없다는 것
지원주택은 노숙인에게 조건 없이 집을 먼저 주는 핀란드의 ‘하우징 퍼스트(Housing First)’ 정책을 벤치마킹한 제도다. 정영일 이랜드재단 대표는 “노숙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고 싶어서 2016년 영등포에서 이틀간 노숙인들과 함께 생활했다”면서 “이 과정에서 거리 노숙인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 술이나 정신질환이 아니라 ‘집이 없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랜드재단이 서울시와 손을 잡고 ‘노숙인 지원주택’ 사업을 시작한 이유다.
서울시는 지원주택 운영에 필요한 조례와 정책을 만들었고, SH(서울주택도시공사)는 원룸형 연립주택을 매입해 주거공간을 확보했다. 이랜드재단은 노숙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원룸 보증금 300만원을 대신 내주기로 했다. 여성노숙인 지원주택 운영기관 ‘아가페복지’에서 근무하는 심영회 팀장은 “시설, 고시원, 쪽방, 병원 등에서 지원주택으로 넘어오는 노숙인 대부분이 ‘몸’과 ‘빚’만 가지고 온다”면서 “300만원은커녕 30만원도 없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2016년부터 3년간 진행한 지원주택 시범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관련기사 ‘어느 날, 노숙인에게 집이 생겼다… 脫노숙을 위한 2년의 실험’〉 2019년 본사업이 시작됐다. 시범사업 때 38호였던 지원주택 수는 2022년 7월 기준 248호로 7배 가까이 늘었다. 이랜드재단은 호당 300만원씩 총 234명의 노숙인에게 총 7억 200만원의 보증금을 지원했다.
지원주택 입주 노숙인 90%, 회전문 벗어나
6년간 이어진 지원주택 사업의 성과는 높은 ‘주거 유지율’로 입증되고 있다. 지원주택 운영기관이었던 비전트레이닝센터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입주민들의 최근 3년간 주거 유지율이 90%를 웃돌았다. 지원주택에 살기 시작한 노숙인 대부분이 ‘회전문 현상’을 벗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뱅뱅 도는 회전문처럼 노숙인이 쉼터-시설-거리를 맴돌기만 하고 탈(脫)노숙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회전문 현상이라고 한다. 심영회 아가페복지 팀장은 “정신질환이나 알코올 문제가 있는 노숙인에게는 주거 유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며 “주거 유지를 1년 이상 하면 사실상 탈노숙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애초 지원주택은 노숙인 중에서도 가장 사각지대에 놓인 노숙인을 위해 생겨난 제도다. 기존에도 공공에서 운영하는 ‘매입임대주택’ 이라는 게 있어서 노숙인들이 입주할 수 있었지만, 저축 상태나 근로 능력 등을 판단해 지역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위주로 뽑다 보니 정신질환이나 알코올 문제가 있는 노숙인은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반면 지원주택은 정신질환과 알코올 의존증을 가진 노숙인에게만 입주 신청 자격을 준다.
전문가들은 지원주택의 성공 요인으로 건물 안에 ‘사회복지사’가 상주하면서 노숙인의 생활을 돕는다는 점을 꼽는다. 집만 주는 게 아니라 필요한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구조다. 시범사업 때는 주택마다 사회복지사 1명을 배치해 노숙인의 지역사회 복귀를 도왔지만, 본사업을 진행 중인 지금은 입주민 6명당 1명꼴로 사회복지사를 배치하고 있다. 남성노숙인 지원주택 운영기관 ‘나눔은희망과행복’의 박성희 팀장은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노숙인들을 뽑아서 집만 주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면 회전문 현상이 똑같이 발생하게 된다”면서 “전담 인력이 곁에서 돕고 지원해주기 때문에 주거 유지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여성 노숙인들은 우울증, 양극성장애, 조현병 등의 정신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아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약물 관리가 필수적이지만 지원주택의 규정상 방문을 닫고 들어가면 어떤 터치도 할 수가 없어서 약을 먹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심영회 아가페복지 팀장은 “도와줄 건 없는지 물어봐도 ‘괜찮아요’ ‘필요 없어요’라는 말만 반복하고 눈맞춤도 하지 않던 입주자가 있었는데, 1년이 지나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면서 “지금은 사무실로 내려와 같이 밥을 먹을 정도로 좋아졌고 단순 포장 작업이지만 일도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심 팀장은 “기다려주며 신뢰를 쌓는 게 사회복지사들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지원주택 입주 돕는 ‘전환주택’ 등장
서울시가 최근 발표한 ‘2021 노숙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서울 노숙인 수는 2016년 1만7532명에서 5년 새 1만4404명으로 17.8% 감소했다. 현장 전문가들은 그러나 통계에 잡히지 않는 노숙인이 여전히 많다고 지적했다. 이윤정 이랜드재단 본부장은 “약간의 소득은 있으나 주거지가 없는 사람, 일용직 일을 하면서 여관을 전전하는 사람들은 노숙인 통계에 빠져 있다”면서 “보증금 300만원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 ‘노숙인 지원주택’ 사업이 지속가능하게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소영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원주택이 노숙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모델이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말했다. 특히 지원주택 ‘입주 후’의 서비스보다 ‘입주 전’의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민 교수는 “노숙인이 지원주택에 입주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서류가 15개에 달한다”면서 “시설이나 센터를 경유하지 않은 거리 노숙인의 경우 이런 게 모두 장벽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원주택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정신질환이나 알코올 의존증을 입증해야 하는데, 거리 노숙인이 자발적으로 정신과를 찾아가 소견서를 받는다는 것부터가 무리라는 설명이다.
박성희 나눔은희망과행복 팀장은 “노숙인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서류를 준비해 SH에 제출하더라도 실제로 입주하기까지 5개월 정도 걸린다”면서 “그 기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노숙인도 많다”고 했다. 월 50만원 내외의 기초수급비로 살아가는 쪽방·거리 노숙인에게는 5개월은 너무 길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린여성센터는 지원주택 입주 전단계의 노숙인을 돕는 ‘전환주택’을 운영 중이다. 거리·쪽방 노숙인은 전환주택에 6~10개월간 머물며 지원주택 입주에 필요한 서류를 사회복지사와 함께 준비할 수 있고, 복지서비스도 이용할 수 있다. 서정아 열린여성센터 소장은 “전환주택은 노숙인이 지원주택에 성공적으로 입성할 수 있게 돕는 곳”이라며 “주거와 서비스를 함께 제공한다는 점에서 지원주택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황원규 더나은미래 인턴기자 wonq@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