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비전문가 대학원생을 재단 이사로 추천… 준비 없이 시작된 외부이사 선임제

기업재단 이사 선임 논란
지난해 1월 27일 시행한 사회복지사업법 ‘지자체 추천 인사 중에서 이사 뽑아야’
인력풀 없이 시행… 비전문가 추천하기도
“정부 추천 외부 인사 앉히기보다 전문기관 모니터링으로 투명성 강화해야”

“결격 사유 없으면 받아라. 아니면 해산하라.”

20년 넘게 아동복지사업을 지원해온 A기업재단은 최근 서울시 사회복지위원회로부터 협박성 통보를 받았다. 협의체가 추천한 인물을 A재단 외부이사로 선임하라는 압박이었다. A재단은 당혹스러웠다. 협의체가 보내온 추천 명단에는 사회복지 전공 대학원생과 건설 전문 변호사 2명뿐이었다. 복지 경험이 풍부한 교수, 공익단체장, 언론인, 기업인 등을 이사로 선임해 재단의 방향성과 지원사업을 결정해온 A재단 내부에선 추천이사의 ‘자격 미달’ 논란이 일었다. 협의체에 다른 인물을 추가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재단에서 감춰야 할 사항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만 돌아왔다. 그렇다고 거부할 순 없었다. 지난해 1월 27일 시행된 사회복지사업법 때문이다. 모든 사회복지법인은 이 법에 따라 각 시·도에 구성된 사회복지위원회나 시·군·구에 설치된 지역사회복지협의체가 2배수로 추천한 외부 인사 중에서 반드시 이사를 선임해야 한다. A재단 관계자는 “아무리 그래도 대학원생을 이사로 추천하는 건 아니지 않으냐”면서 “몇 달간 법인 해산이냐, 법인격 변경이냐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설립 취지가 퇴색될 수 있어 섣불리 결정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결국 A재단은 고민 끝에 건설 전문 변호사를 외부이사로 선임했다.

일러스트=김의균 기자
일러스트=김의균 기자

◇”추천할 사람이 없다”… 공익재단들 이력서 들고 ‘눈물의 로비’

최근 기업이 출연한 공익재단 사이에선 외부이사 문제가 ‘핫 이슈’다. 올 1월 이후 각 재단 이사들의 임기가 줄줄이 만료되면서, 지자체 소속 협의체에 추천 요청이 쇄도하고 있기 때문. 이 과정에서 속앓이를 하는 재단들이 늘고 있다. 10년간 지역에서 복지사업을 진행해온 H기업재단은 1년 만에 간신히 외부이사를 선임했다. 이사 추천을 계속 미뤄온 협의체 때문이다. A재단 관계자는 “사업예산을 결정하려면 당장 이사회가 꾸려져야 하는데, 협의체에선 계속 ‘기다려달라’는 말만 되풀이하더니, 뒤늦게 ‘추천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실토하더라”면서 “충분한 인력풀을 확보하지 않은 채, 협의체가 추천한 이사를 선임하도록 하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고 말했다.

각 시·도 사회복지위원회, 시·군·구 협의체들은 법이 시행된 지난해 1월에야 부랴부랴 사회복지법인 외부이사추천 공고를 냈다. 만 19세 이상의 사회복지에 관심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든 응시할 수 있는 ‘자기 추천’ 방식이다. 현재 전국의 사회복지법인 수는 총 1744개(2013년 9월 기준 복지부 통계). 한 법인당 평균 2명의 외부이사를 선임하면 약 3500명의 전문가가 필요한 셈이다. 문제는 사회복지법인 이사가 무보수 명예직이고 해당 법인이 문제 될 경우 책임만 떠안기 때문에, 대부분 사회복지법인 이사 자리를 꺼린다는 점이다.

협의체로부터 마땅한 인물을 추천받지 못하고 선임 절차가 지연되자, 각 재단은 ‘거꾸로 추천’에 나섰다. 6개월간 이사 선임을 하지 못한 S재단 관계자는 “답답해서 평소 인연을 맺은 교수·공익단체장 등 전문가들에게 직접 찾아가 협의체 인력풀에 들어가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면서 “추천할 사람도 없으면서 엉뚱한 인물을 이사로 선임하라는 강요가 많아, 몇몇 재단들은 협의체 공무원들에게 추천할 만한 인물의 이력서를 들고 가서 밥 사고 술 사는 등 눈물의 로비를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강철희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는 “도가니 사건처럼 문제가 된 시설법인이라면 모니터링을 강화할 필요가 있지만, 공익재단처럼 정부 지원금을 받지도 않고 지원법인에 불과한 곳들에까지 관(官)이 추천한 인물을 이사로 선임하라는 건 심각한 내정 간섭”이라면서 “인력풀을 제대로 구성할 때까지 유예하거나, 인력 추천 시스템을 정비하지 않으면 곧 실패할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이사 선임 지연돼 벌금 물어야 할 재단 속출… 민간 모니터링 기구 필요해

협의체가 이사 추천을 미뤄 당장 벌금을 물어야 하는 기업 재단들도 있다. C재단 관계자는 “정관상 2개월 내에 이사 선임 등기를 하지 않으면 재단 대표이사 앞으로 벌금이 나오는데, 벌써 기한을 3개월 이상 넘겨버렸다”면서 “CEO가 이사장인 경우가 대부분인 기업 재단의 경우 법원의 벌금 결정이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2개월 내에 선임등기를 해야 하는데, 각 협의체의 이사 추천 심사는 3개월마다 이뤄지는 엇박자도 문제”라면서 “이에 뒤늦게 민원을 받은 협의체가 문서상 추천·선임 날짜를 앞당겨서 적는 등 변칙 사례도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외부이사를 선임한 S재단 담당자는 “대다수 기업이 출연 재단과 함께 사회공헌 사업을 연계하고 있는데, 절차가 지연돼 기업 사회공헌 실행까지 늦어진다”면서 “기업 사정을 잘 모르는 외부이사를 추천해 조언을 구하기 난감하단 재단들도 있다”고 전했다. 시청과 구청 간의 ‘떠넘기기’도 문제다. 20년간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해온 한 대표는 “인력풀이 부족한 구청은 시청에 문의하라고 하고, 시청은 ‘구 관할 문제를 왜 여기에 이야기하느냐’면서, 서로 책임을 미룬다”면서 “관련 법 내용을 잘 모르는 공무원들도 많아 궁금한 사항에 답변 듣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시 복지정책과 관계자는 “365일 실시간으로 외부이사 추천을 받고 있고, 서울시엔 현재 500명의 인력풀이 있다”면서 “시설법인이든 지원법인이든 후원금을 받는 사회복지법인은 세금 공제를 받기 때문에 통제와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정무성 숭실사이버대학교 부총장은 “미국에선 민간 기관인 ‘재단센터(Foundation Center)’가 각 재단을 모니터링하고, 각 재단의 예산은 물론 상위 5명의 연봉까지 홈페이지에 전부 공개한다”면서 “정부가 추천한 외부이사를 앉힌다고 해서 공익재단의 투명성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갖춘 외부 민간 기관의 모니터링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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