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농업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네덜란드는 ‘첨단 원예농업’, 스페인은 ‘유럽의 텃밭’, 프랑스와 독일은 ‘농업 대국’ 등으로 저마다 이름을 드높였지만 유독 영국만은 예외였다. 영국 음식에 대해 불평하는 게 세계인의 에티켓처럼 통용되고 있지만 영국 농업도 그 음식만큼이나 개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상황이 변하고 있다. 요즘 혁신적인 농업 뉴스들은 종종 영국발이다. 그것도 스마트팜이다. 과채류의 대부분을 수입하는 영국에서 스마트팜이라니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영국 동부에 위치한 노리치(Norwich)와 베리 세인트 에드먼드(Bury St. Edmunds)에서는 1900억원의 자본이 투자된 28ha 규모의 스마트팜이 들어섰다. 영국에서 규모 있는 스마트팜이 들어섰다는 게 좀 어색하긴 하지만 우리나라도 이 정도에 놀랄 수준은 넘어섰다. 올해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간 경북 상주시의 스마트팜 혁신밸리는 1548억원이 투자됐다. 다만 노리치 스마트팜 프로젝트를 주도한 저탄소사업 컨설팅 전문기업인 로우카본파밍(Low Carbon Farming)은 향후 4조원을 더 투자해서 전국 각지에 새로운 스마트팜을 신축하겠다는 놀라운 계획을 밝혔다. 양배추나 당근 정도나 자국에서 생산하던 영국에서 스마트팜에 이렇게 과감하게 투자하는 배경이 궁금했다. 스페인의 온화한 기후와 네덜란드의 엄청난 원예작물 생산성과 경쟁하는 건 일면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영국의 비밀병기는 에너지다. 시설 원예농업에서 에너지는 전체 생산비의 10~15%를 차지한다.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에너지 비용이 생산비의 60%에 달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난방에 사용되는 에너지다. 로우카본파밍은 버려지는 잔열에 주목했다. 하수처리장에서는 많은 열이 발생한다. 정화를 거친 방류수를 바로 하천으로 흘려보내면 하천 생태계에 영향을 준다. 우리나라에서도 주변 하천수보다 높은 온도의 방류수로 인한 하천 생태계 교란 뉴스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로우카본파밍은 히트펌프를 이용해 방류수의 열을 회수한 후 온실 난방에 사용한다. 이외에도 열병합발전기도 함께 결합했다. 전기를 생산할 때 발생하는 열을 온실 난방에 이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온실에 필요한 이산화탄소도 공급할 수 있다. 이런 접근방법은 스마트팜의 에너지 비용뿐 아니라 탄소발자국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다. 영국 존스푸드컴퍼니(JFC)는 글로스터셔에 세계 최대의 수직농장을 신축했다. 테니스코트 70개의 면적이다. 이 회사는 향후 10년 이내에 영국에서 소비되는 신선 채소의 70%는 수직농장에서 생산될 것이라고 공언한다. 이런 상상이 가능한 것도 역시 영국에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의 힘이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은 풍력발전에 최적이라는 평가처럼 영국은 재생에너지가 가장 풍부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영국의 이런 과감한 시도는 브렉시트(Brexit)의 영향도 있다. 식량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수입농산물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지역에서 생산을 늘려가는 게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로우카본파밍은 에너지 절약형 스마트팜 통해서 두 지역에 360개의 영구적인 일자리를 만들었고 영국에서 소비되는 토마토의 12%를 공급하고 있다. 탄소발자국은 기존 방법 대비 75%를 감축했다. 물론 하천 생태계가 더 건강해진 건 덤이다.
지금까지 온실 난방에 지열과 수열 등 다양한 종류의 히트펌프가 폭넓게 사용됐다. 그렇지만 하수처리장의 잔열을 활용할 수 있도록 이 정도로 규모를 키운 건 로우카본파밍이 처음이었다.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영국의 최대 투자사인 그린코트캐피털(Greencoat Capital)과 영국 연금펀드에서 투자했고 지자체와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다. 모두가 탄소중립과 식량자급률 향상에 대해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의 혁신적인 접근방법은 스마트팜의 경쟁력이 에너지 효율성 중심으로 옮겨졌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온실 면적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중 하나이고, 시설원예는 농민들의 중요한 소득원이다. 기후 여건상 탄소발자국은 높을 수밖에 없다.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건 시설 원예산업의 경쟁력과 지속가능성 향상과 함께 탄소중립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누가 깃발을 들 것인가?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