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십자의 힘 ‘긴급 구호’]
전국 15지사 전문 인력과
주민 자원봉사자가 ‘원 팀’
체계적으로 구호활동 나서
재난이 발생하면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구호 단체가 있다. 사고 발생 직후 소방, 행정 당국 다음으로 투입되는 대한적십자사다. 올해만 해도 3월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 지역의 산불을 비롯해 8월 수도권 집중호우, 9월 태풍 힌남노 피해 현장에서 긴급 구호 활동의 선두에 섰다. 이들이 재난 대응에 자원을 집중 투입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사고 발생 이후 7일까지다. 정부 차원에서 피해 복구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데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적십자 구호 활동은 전국 15지사에 배치된 재난 대응 전문 인력과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이뤄진다. 올해 현장에 투입된 봉사자만 7900명에 이른다. 피해 복구 현장마다 적십자 자원봉사자를 상징하는 ‘노란 조끼’ 부대가 항상 뒤따르는 이유다.
재난 현장에서 누구보다 발 빠르게
적십자사는 재해구호법 제2조 4항에 명시된 법정 구호 지원 기관이다. 일반적인 민간 구호 단체와 달리 정부·지방자치단체와 재난 대응을 위한 대응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재난 대응에 대한 행정과 현장 경험을 두루 갖춘 ‘재난 대처 전문가’들이 재난 대응부터 초기 피해 복구, 사후 관리까지 도맡는다.
“기상 특보가 내려지면 지역 지사에 재난 상황실을 항상 꾸립니다. 직원들이 지방자치단체와 연결하고 대응을 준비하다 보면 사람들이 하나둘 상황실로 오시죠. 생업이 있는 자원봉사자들입니다. 태풍이 올라온다거나 폭우가 내리는 날이면 연락하기도 전에 상황실에 와서 대기해요. 회사에 휴가를 내고 오시는 분도 꽤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적십자 직원들과 ‘원 팀’을 이뤄 구호 활동에 나서는 겁니다.”
김동기 적십자사 재난구호팀장은 재난 피해를 줄이려면 지역 내 사정을 잘 아는 주민들로 구성된 대응팀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적십자사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은 자원봉사자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적십자 자원봉사자는 22만명이 넘는다. 매년 수해를 입는 지역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역 주민들은 재난을 예방할 수 있고, 사고가 발생하면 즉각 대응도 가능하다. 특히 훈련된 인력으로 구성된 ‘NDRT(국내 재난 대응팀)’는 초기 피해 조사와 현장 대응에 나서고, 이재민을 대상으로 하는 복구 작업에는 ‘부녀 봉사회’가 주로 투입된다. 적십자사는 지역 봉사자들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매년 구호 훈련을 진행하는 동시에 지자체와 공동으로 실시하는 재난 대응 긴급 구조 종합 훈련에도 함께 참여한다.
피해 규모가 클 때는 인근 지역에서 인력을 파견한다. 적십자는 전국을 네 권역으로 구분해 긴급 구호 활동을 벌인다. 우선 한 권역에 있는 인력과 자원을 피해 지역에 투입하고, 부족할 경우 인근 지역에서 끌어오는 방식이다. 김 팀장은 “무작정 현장으로 자원을 보내면 혼란만 가중된다”며 “피해 조사를 정확하게 해서 적정한 수준의 지원을 해야 재난 복구에 효과적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재난이 터지면 현장에서 봉사하고 싶은 분이 많은데, 상황에 맞춰 인력을 조절하다 보니 부득이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재난은 과거보다 빈번하게 또 큰 규모로 발생한다. 적십자사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10월까지 국내 재난 구호 지원 대상자 수는 143만8938명이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지원 대상자 상승 효과도 있지만 지난 2018년 1만8459명, 2019년 4만1549명과 비교하면 급격히 늘어난 규모다. 자연 재난 항목만 놓고 보면 더 뚜렷해진다. 지난 2018년 자연 재난으로 지원받은 대상자는 9754명. 이듬해 9685명으로 비슷한 수준을 보였지만, 2020년 4만5806명, 2021년 1만2144명, 2022년 19만2618명으로 뛰어올랐다. 김 팀장은 “최근 들어 자연 재난과 사회 재난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지만, 기상청에서 실시간 기상 정보를 전달받아 예측할 수 있는 자연 재난은 대비한 만큼 피해를 줄 일 수 있다”면서 “사고 이후 구호 활동을 얼마나 신속하게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사전에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구호 활동 범위 ‘심리 회복’으로 확대해야
재난 대응에 긴급 구호만큼이나 최근 중요한 지점으로 떠오는 게 ‘심리 지원’이다. 보통 긴급 구호 이후 상황이 정리되고 나면 여러 지원 단체가 빠져나간다. 그사이 이재민들의 심리 지원에는 공백이 발생한다.
적십자사는 행정안전부 위탁 사업으로 전국 17시·도에서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구호 활동에 투입되는 요원들과 이재민들의 심리적 안정을 챙기는 활동이다. 보건복지부에서 운영하는 ‘트라우마센터’는 심리 상담을 넘어 의학적으로 접근하는 심리회복기관이다.
재난 현장에서는 ‘심리적 응급처치’도 필요하다. 산불이나 수해로 집과 재산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피해 복구 기간을 견딜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다. 김동기 팀장은 “구호 활동에서도 돈으로 안 되는 게 심리 지원”이라며 “현장에 들어가서 마지막까지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심리 지원까지 구호 활동에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에는 정신건강전문요원, 전문 심리 상담사 등으로 구성된 심리 활동가 1300여 명이 배치돼 있다. 전문 인력도 있지만 교육을 받은 일반 자원봉사자도 포함된다. 재난 초기에는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주민들이 이재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심리 활동가로 적합하다는 판단에서다.
사전에 모집된 심리 활동가들은 재난 상황 발생 즉시 심리적 응급 처치를 위해 투입된다. 센터를 통해 심리 상담을 받은 대상자는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 2018년 4642명에서 2020년 9526명, 올해는 10월 기준으로 1만2832명에 이른다.
최근 서울 이태원에서 158명이 압사한 ‘10·29 참사’ 이후에도 한 달간 피해자 지인을 비롯해 심리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국민을 대상으로 심리 지원에 나섰다. 현재는 ‘24시간 핫라인’이라는 이름으로 상담 전화 회선을 열어두고 있다.
심리 지원 사업이 갑자기 생겨난 건 아니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전국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면서 대응 방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대한적십자사는 2016년 행정안전부와 함께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를 설치하고 재난 피해자의 심리 회복과 일상 복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김 팀장은 “국민적으로 우울감에 빠질 수 있는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 물자 지원만큼이나 심리 지원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대한적십자사·더나은미래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