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는 다이달로스가 만든 미궁을 지나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 공주가 전해 준 실타래 덕분이었다. 최근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보면서 현대는 정보전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한다. 무차별 폭탄을 쏟아붓던 과거의 전쟁은 드론을 통해 정밀하게 관측하고 정확도 높은 유도무기를 사용하여 표적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한 국가의 군사력은 가지고 있는 무력의 양이 아니라 정보의 질에 달려있다는 게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식량위기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는 게 느껴진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에너지와 식량의 무기화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세계 각지에서 기상재해가 빈발하면서 식량위기를 먼 미래라기보다 눈앞에 닥친 현실로 인식하는 듯하다. 강의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식량은 안전하냐’고 묻는다. 때로는 대안까지 제시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렇지만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는 있어도 대안까지 제시하기는 어렵다. 문제를 분석하는 것은 현상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대안은 실증을 통한 검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가능성도 발견한다.
최근 농수축산물 무역 거래 플랫폼 스타트업인 ‘트릿지(Tridge)’가 농업계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국내 농식품 분야 최초의 ‘유니콘’에 등극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낯설게 느껴진 이유는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서비스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국내 농업계와 접점이 거의 없어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트릿지의 핵심 서비스는 농수축산물이 필요한 구매자에게 세계 여러 농업 현장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연결해주는 ‘풀필먼트 솔루션’이다. 세계 각국의 농업과 무역에 대한 폭넓은 정보망과 전문인력이 뒷받침해줘야 가능한 사업모델이다. 트릿지는 수년에 걸쳐 국제 농수축산물 거래 가격, 수출입 물량, 품질 등 수십만 종의 다양한 거래 데이터를 확보했다. 나라별 농업에 대한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트릿지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수준과 시장지배력도 확장될 것이다.
우리나라 농업 연구를 책임지고 있는 농촌진흥청에서는 국제농업협력에도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 22개국에서 코피아(KOPIA)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농진청은 코피아 센터를 통해 농업전문가를 파견하고, 농업기술과 우수한 품종을 개도국에 전해주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한국의 벼 품종을 통해서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있고, 중남미에서는 작물 재배부터 수확 후 관리기술까지 농업기술 혁신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농업연구협력은 수혜국만 도움을 받는 건 아니다. 우리 역시 세계 각국의 농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미래 농업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축적된 경험과 데이터는 농업 스타트업들의 세계 진출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을 의외의 장소에서 다시 마주쳤다. 독일은 역사적인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코페르니쿠스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별도의 전략연구를 아리아드네의 실이라 명명했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미궁을 지나 기후위기라는 괴물을 잡기 위해 아리아드네의 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랐던 건 다른 데 있었다. 3년간 추진될 전략연구의 연구비가 400억원을 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정책연구에 작게는 2000만원에서 많아도 수억원 정도만 지원한다. 연구 기간도 길어도 1년을 넘지 않는다. 우리도 기후변화와 식량위기라는 미궁을 헤쳐나가기 위해 아리아드네의 실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농업 연구개발예산은 1조2000억원에 이른다. 특히 기계와 전자 등 제조업 분야의 높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산업기반은 우리나라의 첨단 스마트농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배경이다. 우리의 농업을 국내로 국한하지 않고 세계로 관심을 돌리면 더 많은 유니콘이 농업 분야에 나타날 것이다. 국내 농업 기업들이 더 많이 세계로 나갈수록 우리는 더 많은 농업생산정보와 인적 네트워크를 갖게 된다. 그리고 세계농업과 더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식량은 더 안전해지게 된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