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4일(수)

“매주 목욕탕이 찾아갑니다”… 노숙인 자립 돕는 ‘찾탕’

휴일이던 지난 7월 31일 오전 9시 30분. 서울 지하철 종각역 5번 출구 앞에 4.5t짜리 트럭이 들어섰다. 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려 비닐 천막 두 동을 뚝딱 세우고 식탁과 의자를 배치했다.

오전 10시가 가까워 올수록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커다란 등산 가방을 짊어진 남성이 있는가 하면 작은 크로스백을 멘 남성도 있었다. 가방 대신 ‘서초구’라고 적힌 종량제봉투 안에 마스크와 여벌 옷을 챙겨온 사람도 있었다.

지난 7월 31일 오전 9시 30분 서울 지하철 종각역 5번 출구 앞에 들어선 ‘찾탕(찾아가는 목욕탕)’ 트럭과 천막. /유민선 청년기자
지난 7월 31일 오전 9시 30분 서울 지하철 종각역 5번 출구 앞에 들어선 ‘찾탕(찾아가는 목욕탕)’ 트럭과 천막. /유민선 청년기자

이른바 ‘찾탕(찾아가는 목욕탕)’으로 불리는 이 트럭은 노숙인들을 위한 이동식 목욕탕이다. 매주 일요일마다 종각역 5번 출구 앞에서 노숙인을 맞는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운영을 중단했다가 올해 4월 재개했다.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용기

찾탕 대표인 이대유(60)씨는 지난 2018년 여름부터 노숙인들을 위해 직접 트럭을 몰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씻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의 시작”이라며 “노숙인들이 편견에서 벗어나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한때 디자인회사를 운영했던 이씨는 경영이 악화하면서 사업을 접고 대리기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대리운전 기사 일을 하면서 지하철역에 들어가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었다. 직장을 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노숙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씨는 “대화를 나누거나 돈을 건네기도 했지만, 그 돈으로 술이나 사 마시는 듯했다”면서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니며 악취를 풍기는 노숙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날 오픈 준비를 마친 이씨가 발걸음을 옮겼다. 근처 다이소에 들러 칫솔, 면도기, 종이컵 등을 샀다. 찾탕에는 노숙인들이 목욕 후 갈아입을 수 있는 새 속옷과 양말도 구비돼있다. 찾탕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은 한 달에 200만~300만원이다. 지방자치단체나 타 단체의 지원을 받지 않고 사비로 감당하고 있다. 후원자들이 보내주는 돈을 제외하고 모든 비용을 대리기사 수입으로 충당한다.

트럭 내부 공간은 1인용 샤워 부스와 간이식당으로 나뉘어 있다. 초기에는 샤워시설 제공만을 목표로 시작했다. 그러나 목욕하고 나오니 배고프다는 노숙인들의 말에 간이식당을 만들었다. 이날 간이식당에는 라면, 계란, 김치만두, 밥 등 요리 재료들이 준비돼 있었다.

찾탕 천막에서 식사 중인 노숙인들과 이대유(오른쪽) 찾탕 대표. /유민선 청년기자
찾탕 천막에서 식사 중인 노숙인들과 이대유(오른쪽) 찾탕 대표. /유민선 청년기자

줄을 서면 무료로 배식을 받는 시설과 달리, 이곳에서는 직접 요리를 해먹어야 한다. 노숙인들은 김치볶음밥, 계란 2개를 푼 라면, 계란 간장밥, 김치찌개 등 각자 취향대로 요리했다. 식사 후엔 설거지도 해야 한다. 믹스커피 한잔의 여유도 즐길 수 있다.

이날 오후 4시쯤 한 노숙인이 오더니 “커피 한 잔만 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첫 방문으로 보였다. 이씨는 “여기는 자율적으로 직접 해 드셔야 한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이씨는 스스로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노숙인에 대한 지원은 대부분 무상배급 형태로 이뤄지는데 이는 노숙인들의 진정한 자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씻고 먹는 것만큼은 혼자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찾탕의 최종 목표는 노숙인들의 자립이다.

노숙인에게 ‘대장’으로 불리는 사나이

“내가 아주 여기 덕을 많이 봤지. 대장 없었으면 난 죽었어”

이대유씨는 찾탕을 운영한 후로 ‘대표’ ‘사장’ ‘이사장’ ‘형님’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그중 독특하게 그를 대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김모(63)씨는 오랜 노숙생활을 하다가 3년 전 찾탕을 처음 찾았다. 그 후 일요일마다 목욕을 하고, 라면과 토스트를 먹으러 왔다. 매주 오다보니 이씨와 친해지면서 천막 설치나 트럭 내부 청소를 돕게 됐다. 이렇게 1년 정도 스태프로 근무했다. 본인과 같은 상황에 부닥친 노숙인들을 돕는 일을 하며 보람을 느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자신감을 되찾았다고 한다. 현재는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 종합지원센터에서 노숙인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짤짤이(돈)만 생기면 술을 사 마시던 때가 있었는데 대장 덕분에 지금은 일도 하고 돈 벌어 고시원에 들어가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찾탕에서는 찢어진 옷을 입고 술에 절어 있는 노숙인을 볼 수 없었다. 이씨는 “다른 봉사단체나 교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보고 ‘이렇게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냐’라며 깜짝 놀란다”고 했다. 그는 “노숙인을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니까 다 대신해주게 되는 것”이라며 “이런 편견을 깨고 자기 일은 스스로 해결토록 해야 자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지가 생긴다”라고 말했다.

이용자들에게 찾탕을 알게 된 경로를 묻자 대부분이 다른 노숙인의 추천을 받고 왔다고 답했다. 시설에 입소하지 않는 이상 씻을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어서 공중 화장실에서 씻어야 한다. 이날 만난 고모(57)씨는 “집이 없는 건 괜찮은데 제대로 씻지 못한 상태에서 사람들의 멸시가 느껴질 때 제일 힘들다”라며 “몸을 씻을 수 있는 찾탕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이곳은 노숙인들에게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한다. 각자 만든 요리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고향 이야기부터 방수매트 자랑, 서울역에서 티비를 보다가 알게 된 최신 뉴스까지 대화 주제는 다양했다. 지난주에 누군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자 진통제를 챙겨온 노숙인도 있었다. 비가 오는데 우산을 왜 안 챙겼냐는 걱정 담긴 잔소리도 들려왔다. 신모(48)씨는 “찾탕은 노숙인들을 위한 사랑방 같은 곳”이라며 “여기 오면 눈치 안 보고 천천히 밥 해먹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오후 5시20분. “대표님! 대표님!”이라 외치며 한 남성이 트럭으로 들어왔다. 이씨는 “우리 계란귀신이 드디어 오셨네”라며 반겼다. 한 번 올 때마다 계란을 20개씩 삶아 먹고 가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오늘은 다른 일정이 있다며 커피만 타가겠다고 하자 이씨가 라면 3봉지를 챙겨줬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마감 시간인 오후 5시 30분까지 총 28명이 찾탕을 다녀갔다. 보통 40-50명이 찾지만, 이날 비가 내리면서 평소보다 적었다고 했다. 하루에 300명이 방문한 적도 있다고 한다. 찾탕은 코로나19로 인한 1년 4개월의 휴무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기다리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돈도 명예도 없지만 노숙인들 옆에 있겠다는 약속은 꼭 지킬 것”이라고 했다.

유민선 청년기자(청세담1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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