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휩쓸고 간 자리, 복구의 시간이 남았다. 지난 8일부터 이어진 집중호우는 멎었지만 피해가 집중된 일부 지역은 여전히 복구되지 않은 상태다. 무너진 마을에 당장 필요한 것은 ‘일손’이다. 집에 들어찬 빗물을 퍼내는 일부터 물에 잠겼던 가구와 전자제품을 문밖으로 옮기는 것, 흙투성이가 된 바닥을 쓸고 닦는 데까지 일일이 손이 간다.
수재민을 돕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웃 마을에서, 인근 대학교에서, 비슷한 재난을 경험한 적 있는 먼 지역에서 자원봉사자의 도움의 손길이 모여들고 있다.
“지금 일손 모자란 곳 어딘가요?”
“봉사하러 왔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요. 시간 여유 되는 분들은 ○○만화방으로 와주세요. 물 먹은 책들이 너무 무겁네요.”
지난 14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 지역 당근마켓 동네생활 게시판에 이 같은 글이 올라오자 순식간에 댓글이 달렸다. “어딘가요? 정확한 주소 알려주세요.” “그냥 가서 참여 의사 밝히면 되나요?” “아직 계신가요? 지금 가려고 합니다.”
서울 관악구, 동작구, 영등포구 등 폭우 피해가 특히 컸던 지역의 당근마켓 게시판은 이웃들이 공유하는 ‘실시간 수해 복구 상황판’이 됐다. 어느 곳의 상황이 심각한지, 어디 봉사 인력이 부족한지, 봉사에는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실시간으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가령 “오늘 수해 자원봉사 가능한 곳 있나요?”라고 묻는 글에는 현재 사람이 더 필요한 장소 이름을 대면서 “‘1365 자원봉사 포털’을 통해서 신청해 달라”는 댓글이 달린다. ‘1365 자원봉사 포털’은 봉사가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전국의 자원봉사 정보를 한데 모아 제공하는 사이트다. 봉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모집 기관명과 봉사 일시, 활동 내용 등을 확인하고 신청하면 된다.
현장에 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실시간 상황도 전달한다. ○○동주민센터는 직원들이 바빠서 봉사 배정을 받으려면 오래 대기해야 하니 다른 곳부터 방문하는 게 좋겠다고 알려주는가 하면, 고무장갑·랜턴 같은 준비물을 챙겨오라고 댓글로 귀띔해주기도 한다.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재민에게 필요한 이불과 옷 등을 보내거나 자원봉사자를 위한 도시락까지 챙기는 방식으로 힘을 보탠다.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복구 현장 근처 편의점에 미리 음료수 값을 계산해두는 사람도 있다.
피해지역 인근의 대학생들도 나섰다. 중앙대학교가 있는 서울 동작구에는 지난 8일 시간당 141.5mm의 호우가 쏟아져 관측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피해 가구는 4000세대에 달한다. 학생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이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에 ‘수해 봉사를 가자’는 글을 올리며 봉사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동아리나 학과에서 단체로 가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합류하기도 한다.
이지현(중앙대 문헌정보학과 1)씨는 학과 카카오톡 단체방에 공유된 모집 글을 보고 지난 11일 봉사에 참여했다. “누구는 방이 물에 잠겨서 힘들어하고, 누군가는 이들을 돕고 있는데 방학이라고 누워서 늦잠이나 자는 제가 문득 부끄러운 거예요. 그래서 바로 봉사를 하겠다고 했죠. 현장에 가보니 뉴스에서 본 것보다 피해가 훨씬 심각하더라고요. 한 사람의 보금자리가 몽땅 망가져 버린 모습을 보니까 봉사를 하면서도 뿌듯하기보다는 침울했어요. 그래도 현장에서 만난 선배들이랑 서로 격려하면서 열심히 작업했어요.”
전북-경북-충남… 지역 간 ‘봉사 릴레이’
지역 간에는 ‘보은 봉사’가 이뤄지고 있다. 과거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전국 각지에서 도움을 받은 지역민들이 이번엔 도움을 주기 위해 수해 지역으로 달려갔다.
보은하는 마음은 전북에서 경북으로, 경북에서 충남으로 이어졌다. 지난 4월 대규모 산불이 났던 경북 울진의 울진군종합자원봉사센터에서는 지난 19일 봉사자 21명을 모집해 충남 부여로 가 복구를 도왔다. 김덕열 울진군종합자원봉사센터장은 “울진군이 어려울 때 전국에서 구호물품과 성금을 보내준 덕분에 위기를 극복했기 때문에 다시 베푸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4개월 전 산불이 났을 때 울진 주민을 돕기 위해 한달음에 온 것도 지난해 홍수 피해를 입었던 전북 남원 주민들이었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보내왔던 성의를 떠올리면서 차에 감자와 쌀, 김치, 생수 등을 싣고 5시간을 달려 울진을 방문했다.
전남 구례군의 김순호 군수를 비롯한 군청 직원 50명은 지난 16일 서울 동작구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구례군은 2020년 8월 시내 일대가 물에 잠기는 수해를 입었다. 김 군수는 “당시 구례군을 도와주러 온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며 “이번 수해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빠르게 복구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강원 강릉시자원봉사센터에서는 폭설·산불·태풍 등 각종 재난을 겪으며 얻은 ‘복구 노하우’를 경기 광주에서 발휘했다. 지난 17일 봉사자 27명이 산사태가 났을 때 자주 사용하던 고압세척기를 가지고 광주를 찾았다. 세척기로 흙투성이가 된 물건들을 노련하게 닦아냈다. ‘밥차’를 준비해 이재민과 자원봉사자를 위한 음식도 제공했다. 김선정 강릉시자원봉사센터장은 “강릉에서 광주까지 멀기는 하지만 재난상황을 함께하는 ‘공동체 정신’을 느낄 기회였다”고 말했다. “재난이 발생한 지역민 힘으로만 복구를 완료하기는 힘들어요. 서로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죠. 다른 지역에 봉사 가서 강릉에 도우러 오셨던 분을 또 만나기도 해요. 그러면 괜히 눈물이 나기도 하고…. 감동적이에요.”
수해를 입은 지역에서 상황이 더 심각한 지역을 거들기 위해 출동하기도 한다. 지난 23일 충남 아산시자원봉사센터 봉사자들은 부여군 은산면 포도 농가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세종시자원봉사센터 봉사자들은 충남 청양군 메론 농가로 가서 복구를 도왔다. 아산시와 세종시도 피해가 있었지만 피해 규모가 더 큰 이웃 지역으로 향한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원활하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건 자원봉사 관리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갖춰진 덕분이다. 자원봉사센터는 전국 시군구에 총 246곳이 있다. 평소에는 각 지역의 복지와 자원봉사 활동을 지원한다. 재난이 발생하면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의 총괄 하에 전국 센터가 통합자원봉사지원단 체계로 전환된다. 중앙자원봉사센터가 전국의 피해 상황을 파악해 물자와 봉사 인력이 적재적소에 배치될 수 있도록 관리한다. 중앙자원봉사센터에서 운영하는 ‘1365 자원봉사 포털’에서는 재난 지역의 봉사 모집 공고가 우선 노출될 수 있도록 한다. 윤순화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사무처장은 “2018년부터 국가 위기상황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이 같은 시스템을 구축했다”며 “우리나라 자원봉사문화는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미영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장은 “이번에는 전국에서 약 2만명이 수해 복구 봉사에 참여하고 온라인에서도 활발하게 도움을 주고받는 등 이재민을 돕고자 하는 시민의 자발성이 유독 빛났다”면서 “체계적인 자원봉사시스템과 시민의 연대 의식이 시너지를 내서 위기를 극복한 좋은 사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지은 더나은미래 기자 blo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