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안지훈의 생활정책] 젠트리피케이션을 아시나요?

안지훈 소셜혁신연구소장
안지훈 소셜혁신연구소장

몇 해 전 조광진 원작의 드라마 ‘이태원클라쓰’가 큰 인기를 누렸다. 이태원클라쓰는 외식업계 1위 ‘장가’와의 악연을 극복하고, 착한 방법으로 ‘장가’를 인수해 가는 청년기업가의 이야기다. 주인공 ‘박새로이’는 7년간 원양어선을 타며 모은 돈으로 이태원에 작은 포장마차를 연다. 포장마차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인기를 얻어 이태원 맛집으로 유명세를 탔고, 장사도 잘됐다.

박새로이의 작은 성공이 눈에 거슬린 장가 회장은 해당 건물을 사들였고, 자신이 장사한다며 포장마차 퇴거를 요구한다. 극 중의 장가 회장이 벌인 행동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 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상가내몰림현상’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낙후된 도심이 새롭게 활기를 얻는 이후, 해당 도심에 건물주들이 지역을 활성화한 주체들을 쫓아내며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서울의 경우 홍대 앞이나 경리단길, 가로수길이 점차 활성화되면서 전반적으로 품위 있는 고급 상권이 되었지만 오랫동안 자영업을 영위하던 많은 소상공인이 올라가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됐다. 서울뿐 아니라 전주나 경주 등지의 이른바 ‘뜨는 골목’들은 모두 예외가 없었다.

2020년 코로나 19 팬데믹 이후 한동안 젠트리피케이션 이슈가 잠잠했지만, 최근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와 영업제한 조치 해제로 조용했던 건물주와 임차인간 긴장관계는 곧 수면위로 표출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2년 동안, 장사를 하지 못했던 임차인의 고통과 2년간 임대료 인상을 미뤘던 건물주의 상황이 머지않아 사회적 쟁점이 될 것이다.

다행히도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팬데믹 전 서울 성동구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2014년 말, 서울숲 주변 성수동에 지역혁신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성수동은 ‘핫’한 지역이 되었고, 임대료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동구에서는 문제를 파악했지만 자유시장경제에서 임대료 인상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방송과 언론은 임대료를 무분별하게 올리는 건물주의 횡포나 건물주의 이기심에 초점을 두었고, 젠트리피케이션을 건물주와 임차인간의 분쟁이자, 부자와 빈자의 오랜 싸움으로 여겼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성동구의 젠트리피케이션 정책은 바로 이 관점에 반하여 탄생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지역 주민 간 발생한 문제이고, 건물주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시 성동구청장은 알았다.

성동은 젠트리피케이션 정책을 건물주와 임차인의 상생을 위해 추진한다고 못 박았다. 성동구는 건물주와 임차인간 상생협약을 추진했다. 건물주는 임대료 상승을 자율적으로 절제하고, 임차인은 영업공간과 거리환경을 쾌적하게 유지할 책임을 진다. 그리고 성동구는 해당 지역을 위해 적극적인 행정지원을 약속한다.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았지만, 성동구 공무원들은 직접 건물주들을 만나면서 자발적 동참을 이끌어냈다. 2014년부터 성동구 관내 건물주 127명을 일일이 만났고 불과 2년 뒤에는 대부분의 건물주(97명)가 상생협약에 참여했다. 지금은 건물주도 늘고 상생협약 참여자도 더 늘었다. 작년 말 통계를 확인해 보니 무려 187명이나 참여했고, ‘상호협력 주민협의체’라는 지역 거버넌스도 결성되어 있다.

주민협의체는 성동구 주요 상권, 예컨대 서울숲길, 방통대길, 상원길 같은 곳의 환경을 관리하고 새로 입점하려고 하는 대기업 프랜차이즈도 심사한다. 성동구가 도시계획 협치기구로 위상을 설정하고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성동구는 해당 지역을 아예 지속가능발전구역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또한 21개 서울 자치구와 성남시, 전주시, 춘천시 등 전국 39개 기초자치단체장은 젠트리피케이션 해결을 약속했다. 이는 상향식 확산을 거쳐 국회와 중앙정부가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노력에 나서게 했고, 결국 상가임대차보호법도 개정했다. 상생을 저해하는 요인을 제거한 셈이다.

도시의 성장과정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도시의 번영과 쇠락이 자연스러워 보이겠지만 그 번영과 쇠락을 경험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인생의 큰 파랑을 맞닥뜨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본다. 행정과 정치는 범인들의 삶에서 고통의 무게를 줄이고, 행복의 가능성을 높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행정과 정치가 필요한 유일한 이유다.

젠트리피케이션 정책이 건물주와 임차인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정책의 도입은 문제 해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지 문제해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젠트리피케이션을 해결하기로 정책의 방향을 정했고, 그 방향은 코로나 회복기인 지금 다시금 힘을 얻어 건물주와 임차인간 상생을 도울 것이다.

안지훈 소셜혁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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