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단체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단체에 매달 소액을 기부하던 젊은 기부자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였다. 기부자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품을 정리하던 부모는 딸이 수년간 후원하던 단체가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됐고, 딸이 하던 기부를 계속 이어서 하고 싶다며 단체에 문의를 했다. 착실하고 따뜻하게 살다 세상을 떠난 평범한 기부자의 이야기는 그 어떤 유력가의 오비추어리(Obituary·부고 기사)보다도 감동적이었다.
감동이 너무 컸던 탓일까. 그 후로 괴상한 버릇이 생겼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 미래의 어느 날 쓰일 그의 부고를 미리 상상해보는 버릇이다. 일종의 ‘상상 부고’라고 해두자. 사업하는 사람, 모금하는 사람, 투자하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 쌩쌩하게 웃고 말하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죽은 뒤에 그가 어떻게 기록되고 추모될 것인가를 머릿속으로 몰래 적어본다는 게 상대에게는 어쩐지 미안한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의외의 장점이 있다. 개인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기사 쓰는 과정과 비슷하다. 알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끌어모아 리드(첫) 문장과 본문에 들어갈 핵심 내용을 정하고 대략적인 마지막 문장까지 떠올려 본다. 제목도 달아본다. 각자의 삶에서 최대한 주제(기자들이 흔히 ‘야마’라고 부르는 그것)를 뽑아내는 작업이다. 직접 취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한계는 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상상 부고가 써질 때도 있다. 사회로부터 받은 것보다 ‘준 것’이 더 많은 사람을 만났을 때가 그렇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해준 게 없는데 그는 우리에게, 혹은 우리 사회에 준 것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젊은 기부자처럼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은 쉽게 잊히지만 유명한 사람들의 죽음은 미디어에 기록된다. 몇 달 전 뉴욕타임스에 실린 미국 정치인 밥 돌의 오비추어리는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며 인기를 끌었다. 정치인의 경우 노출되는 정보량이 많기 때문에 더욱 드라마틱한 오비추어리가 완성된다. 그래서 정치인의 부고 기사는 언제나 인기가 높다. 정작 본인은 읽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새 대통령이 뽑혔다. 버릇처럼 새 대통령의 상상 부고를 떠올려 봤다. 잘 써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희망적인 일이다. 이제부터 그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훗날 그의 부고 기사는 달리 적힐 것이다. 리드도, 내용도, 제목도 모두 그에게 달렸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편집장 blindletter@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