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틈타 미국석유협회(API)가 바이든 행정부에 “더 많은 원유와 가스 개발을 허용해 달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쟁으로 국제 유가가 치솟자 ‘에너지 안보’를 이유로 들며 이 같은 요구를 하는 것이다. API는 미국 석유·가스 업계를 대표하는 강력한 이익 단체로 정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까지 API의 주장에 가세하며 바이든 행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마이크 소머스 API 회장은 지난 1일(이하 현지 시각) 제니퍼 그랜홀름 에너지부 장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에너지 및 경제 안보를 위해 미국 정부와 업계가 긴밀히 공조해야 한다”면서 ▲모든 액화천연가스(LNG) 사업 신청 건의 즉각 승인 ▲향후 신청 건에 대한 명확한 승인 일정표 제시 ▲멕시코만 유전지대 5개년 임대 계획 완료 ▲원유 및 천연가스 인프라 허가 절차의 투명한 시행 등을 명시한 7개 정책 권고안을 제시하고 시행을 촉구했다.
소머스 회장의 서한이 공개된 당일 API는 미국민의 85%가 국내에서 더 많은 원유 및 가스 채굴을 바라며, 90%는 해외가 아닌 미국 내에서 에너지원 개발을 바란다는 자체 여론조사를 공개하기도 했다. API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하루 전날인 지난달 23일 트위터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위기가 고조되면서 미국의 에너지 지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면서 연방 공유지의 원유 및 가스 추가 개발 허가, 불분명한 규제 해소 등을 요구했다.
환경운동가들과 환경단체들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틈탄 API의 행동이 ‘에너지 안보’를 핑계로 석유, 가스업계의 배를 더욱 불리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며 크게 반발했다. 환경단체 ‘에버그린액션(Evergreen Action)’의 레나 모핏 전략국장은 더나은미래와의 통화에서 “API의 행동은 역겹지만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모핏 국장은 “불행히도 화석연료 업계는 그들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어떤 문제든 정치화할 수 있다”면서 “API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용해 업계의 이익을 챙기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침공을 결정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전쟁 수행비용이 러시아의 원유와 가스 수익”이라며 “세계가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한 앞으로도 푸틴 같은 석유 독재자들의 횡포에 휘둘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부감시기구인 비영리단체 ‘어카운터블US’의 카일 헤리그 회장도 단체 홈페이지를 통해 “API가 석유 및 가스업계 부유한 중역진의 배를 불리기 위해 다시 한번 위기를 악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헤리그 회장은 “미국의 거대 석유업체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추가 유전 개발권을 따낼 생각을 접고 지난해 벌어들인 수백억 달러의 이윤을 자동차 휘발유 가격 인상으로 고통받는 소비자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말했다. 어카운터블US 따르면, 지난해 엑손모빌, 셸, 셰브론을 비롯한 거대 석유업체들이 지난해 올린 순수익은 750억 달러에 달했다. 이 회사들은 모두 러시아 석유 및 가스사업에 관련돼 있다. 이 단체는 특히 API가 2001년 9·11 테러 사건을 비롯해 과거 여러 차례 미국의 위기를 업계의 이익을 증진하려는 방편으로 이용한 전례가 있다면서 API의 이번 행동을 비난했다.
환경단체들의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일부 공화당 의원들도 API의 행동에 맞장구를 치고 나서 빈축을 사고 있다. 하원 에너지 및 상업위원회 공화당 간사인 캐시 로저스 의원은 “바이든 행정부의 반에너지 정책 때문에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면서 “푸틴 대통령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미국의 에너지 패권”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 댄 설리번 상원의원과 톰 코튼 상원의원은 “이번 기회에 바이든 행정부가 즉각 키스톤XL 송유관 사업을 재개하고, 알래스카 북극권야생보호구역(ANWR)의 유전개발 임대사업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리번 의원은 알래스카주 출신이고, 코튼 의원은 키스톤 송유관이 생산되던 아칸소주 출신이다.
키스톤XL 은 캐나다 중서부 앨버타주에서 미국 남부 텍사스주 휴스턴까지 하루 83만 배럴의 타르샌드(모래층에 섞여 있는 원유)를 수송하기 위해 2008년 시작된 대형 송유관 사업이다. 하지만 생태계 파괴를 우려한 많은 환경단체가 거세게 반발했고 2015년 당시 민주당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사업 불허 결정을 내렸다. 2017년 1월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 사업을 재개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해 1월 취임한 뒤 다시 허가를 취소했다.
알래스카의 북극권야생보호구역은 약 43억~118억 배럴의 원유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돼 그간 석유 기업들이 눈독을 들여왔던 곳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행정명령을 통해 시추가 금지돼온 이 지역에 사상 처음으로 유전 및 가스개발 임대 허가를 내주었다. 하지만 환경단체들은 개발이 허용되면 북극권 생태계와 야생동물들에 해를 끼칠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해왔다. 결국 지난해 6월 바이든 행정부는 환경영향평가를 재검토하는 동안 기존의 임대 허가를 모두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환경단체들은 API의 이번 행동이 바이든 행정부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해 미국 내 유가가 지속적으로 치솟을 경우 바이든 행정부가 ‘코노코필립스사의 윌로우(Willow)’ 프로젝트를 허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윌로우 프로젝트는 알래스카 국립석유보전구역(NPRA)을 개발해 향후 30년간 5억 배럴을 생산한다는 코노코필립스사의 야심찬 유전개발 사업이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연방지법은 트럼프 전 행정부가 내준 허가가 불충분한 환경영향평가에 근거했다며 사업 중단 명령을 내렸다. 에버그린액션의 모핏 전략국장은 “솔직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면서 “윌로우 프로젝트가 현재 알래스카 최대의 유전개발사업인데다 환경과 공중 보건에도 안 좋기 때문에 바이든 행정부에 사업을 취소해달라고 계속 압력을 넣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한편 1919년 창립한 API는 엑손모빌, 셸, 셰브론, 콘티넨탈리소스 등 600여개의 석유 및 가스회사를 회원사로 두고 있으며 종사자만 약 13만명에 달한다. 선거자금을 추적하는 비영리단체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API는 2020년 535만 달러, 지난해엔 479만 달러를 각각 로비자금으로 사용했다. 이 단체는 석유 기업들이 제공하는 든든한 재원을 바탕으로 많은 공화당·민주당 전·현직 의원들과 이들이 속한 소관 상임위원회에 정치자금을 후원하며 에너지 관련 입법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찰리변 더나은미래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