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목)

“귀촌해도 ‘집’이 문제… 청년 위한 주택 정책 확대해야”

더나은미래×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공동기획
[농촌으로 간 청년들]
③[좌담회] 이런 정책 왜 없나요?<끝>

서울 소재 국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이지현(34)씨는 어느 날 회의감이 밀려왔다. 일이 바빠 1년 동안 남편과 마주 보고 밥 한 끼 제대로 먹은 적이 없었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2017년 5월, 귀농을 결심하고 충북 괴산으로 내려왔다. 자연 속에서 인생다운 인생을 살기로 했다. 주변에서는 “박사학위까지 받은 네가 농촌으로 가는 것이 아깝다”고 했지만 이씨의 마음은 가뿐했다. 지난 2월에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농업회사법인 ‘뭐하농’을 설립했다. 모임 공간을 만들고, 도시 청년에게 농촌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농촌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

경북 상주에 사는 디자이너 조우리(33)씨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3년 전 상주의 가을 논 풍경에 반해 귀촌했다. 이곳에서 자연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담요와 컵 같은 제품을 만들면서 지낸다. 충남 천안에서 문화기획자로 일하던 김정혁(33)씨 역시 4년 전 충남 서천군에 둥지를 틀었다. 지역의 문화 격차 문제를 해소하고 싶었던 김씨는 2019년 ‘삶기술학교’라는 청년공동체를 만들었다. 이곳을 찾은 도시 청년들은 지역 특산물을 브랜딩하는 등 지역에 도움이 될 만한 각종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러다 서천에 정착하기도 한다. 청년들이 오가면서 서천의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올해 8월 기준 전국 읍·면·동 단위 지역(3553곳)의 50.4%가 ‘소멸위험지역’이다. 도시 인구 집중이 심화하는 와중에도, 일부 청년은 농촌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꾸리고,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장애물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들의 정착을 도우려면 어떤 지원이 필요할까. 지난달 29일 이지현, 조우리, 김정혁씨가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 모였다. 농촌의 청년에게 현실적으로 필요한 정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왼쪽부터 김정혁, 이지현, 조우리씨.
왼쪽부터 김정혁, 이지현, 조우리씨. /양수열 C영상미디어 기자

농촌에서도 ‘집’이 문제야!

―표정이 모두 밝다. 농촌 생활에 만족하기 때문인가?

이지현=서울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쁜 느낌이지만 하루하루 즐겁다. 직장 다닐 때처럼 저녁 6시에 퇴근하고 내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니라, 24시간을 모두 나를 위한 시간으로 쓴다.

조우리=귀촌 4년차지만 여전히 상주의 풍경을 보면 행복하다. 높은 하늘, 해가 뜨고 지는 모습, 너른 논을 늘 눈에 자세히 담으려고 한다.

―그래도 적응할 때 힘든 점이 있었을 텐데.

이지현=집이 정말 없다. 공급이 부족하니 월세가 50만~60만원까지 올라간다. 그렇다고 상태가 좋은 것도 아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땅도 구해야 한다. 그래도 땅은 농지은행에서 청년 창업농에게 시세보다 저렴하게 장기 임대를 해준다. 이 제도를 모르는 청년이 많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김정혁=마찬가지로 집 구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내 경우엔 1950년대에 지어진 가옥을 직접 수리하는 조건으로 5년간 무상 임차를 받아 겨우 집 문제를 해결했다.

―농촌에는 빈집이 많지 않은가?

김정혁=대부분이 불법 건축물이라서 매매가 안 된다. 매물로 나와있는 집도 상태가 굉장히 나빠서 수리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 공급부터 늘려야 한다. 장기임대주택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지현=지금 괴산으로 내려와 정착하고 싶다는 청년이 내가 알기로만 스무 명 정도 된다. 그런데 당장 머물 집이 없다. 서울이나 부산에서 괴산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집을 구하려니까 잘 구해지지도 않는다. 농촌에서는 부동산보다 이장님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많다. 날마다 이장님 얼굴 보면서 보러 다니는 것과 서울에서 전화로 알아보는 건 천지 차이다. 청년들이 집을 구하는 동안만이라도 임시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조우리=경북 상주는 인구가 많았다가 줄어든 도시다. 그래서 빈집이 많기는 하다. 경북대 상주캠퍼스 주변에 원룸촌도 있다. 하지만 영화 ‘리틀포레스트’의 풍경을 꿈꾸면서 내려온 청년은 괴리를 느낄 수 있다.

귀촌 청년에게는 ‘사랑방’이 필요하다

―농촌에 적응하려면 주민과의 관계가 중요할 것 같다.

이지현=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확실히 빨리 적응할 수 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전화로 물어볼 수 있고, 주민들도 ‘○○이 친구’라고 하면 낯선 청년에 대한 경계심을 푼다. 그런데 또래를 만나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 갓 귀촌할 당시엔 청년 네트워크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나도 괴산에 온 지 1년이 지나서야 또래 농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김정혁=지역마다 청년 공동체가 단단해져야 한다. 이 공동체가 정보 부족이나 기존 주민과의 갈등 같은 문제를 보완해줄 수 있다.

―지역 귀농귀촌센터에서도 정착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나.

이지현=농촌에 막 내려온 청년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같은 경험이 있는 청년이 가장 잘 안다. 지역 청년이 모이는 ‘사랑방’ 같은 플랫폼이 있으면 적응에 필요한 정보를 바로 전달할 수 있다. 땅은 어떻게 저렴하게 임차할 수 있는지, 이 지역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작물을 길러야 하는지 등을 알려주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조우리=공동체도 중요하지만, 개인에 대한 지원도 많아졌으면 한다. 귀촌한 청년들이 농촌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나는 ‘도시 청년 시골 파견제’ 사업에서 3000만원을 지원받아 상주 감을 모티프로 한 화장품을 개발했다. 이걸 기반으로 상주에 정착했다. 파견제 사업에 선정돼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친구들도 많다. 이 친구들이 또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 ‘투 트랙 지원’이 필요하다.

성공의 기준은 ‘행복’

―아이를 낳고 나면 병원·학교 같은 인프라가 부족해 도시로 떠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이지현=개인적으로 교육 부분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동네 초등학교에서는 승마, 골프, 악기, 코딩 교육을 다 해준다.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도를 굉장히 많이 하는 것 같다. 도시에서만 할 수 있는 문화생활은 주말에 도시로 나가 접하면 된다.

김정혁=아들이 태어난 지 10개월 됐다. 아이가 크면 서천에 있는 초등학교에 보낼 거다. 학생이 적으니 선생님도 더 신경 써줄 수 있다. 병원도 큰 문제는 안 된다. 20~30분 거리인 전북 군산으로 가면 된다. 생활권을 꼭 농촌으로 한정 지을 필요 없다. 농촌 인근에는 꼭 거점 도시가 있다. 주변 도시와의 이동성을 높이는 도시 개발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유 차량이나 ‘100원 택시’ 같은 시스템을 더 만들어도 좋겠다.

조우리=상주시에서는 공유 자전거 50대를 도입했다. 이 정도만 있어도 생활이 편리하다.

―지자체와의 협력이 중요하겠다.

김정혁=그렇다. 하지만 쉽지 않다. 순환 보직이다 보니 담당자의 사업 이해도가 떨어진다. 청년 정책만큼은 한 사람이 전담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지현=정책을 취지에 맞지 않게 이용만 하려는 청년을 걸러낼 수 있다. 또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건 정책이 청년의 소소한 삶을 응원할 수 있었으면 한다. 청년들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싶어 농촌에 오는 것이 아니다. 연봉 1억이 아니라도, 한 달에 200만원만 벌어도 행복할 수 있다. 사람들이 도시를 동경하고, 시골은 무시하는 이유가 이런 삶이 응원받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농촌의 소박한 삶을 누리는 청년이 많아지면 성공의 기준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농촌은 촌스럽다’는 인식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최지은 더나은미래 기자 bloomy@chosun.com

<글 싣는 순서>
①농부가 얼마나 멋진 직업인데요
②할머니, 제 나이를 묻지 마세요
③[좌담회] 이런 정책 왜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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