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나은미래×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공동기획
[농촌으로 간 청년들]
②할머니, 제 나이를 묻지 마세요
가까워지기 위해선 서로 한 발짝씩 양보
또래 문화 그리울 땐 청년 조직 만들어 교류
터 잡고 오래 살아가려면 인프라 풍부해야
자연과 부대끼는 삶, 수확의 기쁨, 시간적 여유…. 귀농·귀촌 청년들은 도시에서와 다른 삶을 그리며 농촌으로 향한다. 하지만 삶터로서의 농촌은 청년들에게 익숙한 도시와 많은 부분이 다르다. 우선 이웃과의 관계, 일자리, 인프라 등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크게 변화한다.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더라도 이론과 실전은 다른 법. 씨 뿌리면 자랄 줄 알았던 농작물이 예년과 다른 기후로 인해 맥없이 고꾸라지는가 하면, 나이와 살아온 환경이 다른 이웃 주민들과 관계 맺기도 쉽지 않다. 어른들이 툭 던진 말에 상처를 받고, 또래와의 수다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 ‘용감한 개척자’들은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분투한다.
“여자도 이장 할 수 있지 뭐!”
농촌의 평균 연령에 한참 못 미치는 청년들이 오자마자 마을 구성원으로 녹아들기는 쉽지 않다. 청년도, 마을 주민도 서로 존재가 낯설다. 한 공동체 구성원으로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까지는 시간과 약간의 너스레가 필요하다.
안재은(29)씨는 2년 전 충북 청주 문의면으로 이사를 왔다. 마을 어르신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농사짓는 시늉만 하다가 금방 돌아갈 사람으로 여겼다. “젊은 애가 무슨 농사냐”라거나 “시집이나 가라”는 말도 들었다. 재은씨는 그럴수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신정이면 떡국을 한 솥 끓여 이웃과 나눠 먹고, 할머니 집에서 하룻밤 같이 자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함께 마늘을 심었다. 농사일이나 할머니들의 요리를 주제로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유튜브 영상을 찍기도 했다. 어느새 재은씨는 마을의 소중한 구성원이 됐다. 그는 “이장님이 차기 이장으로 나를 점찍었다”며 “처음엔 ‘젊은 여자 이장’을 어색해하던 할머니들도 이젠 ‘여자도 이장 할 수 있지 뭐!’라고 하신다”며 웃었다.
농촌에서는 사생활의 벽이 낮다. 익명성이 보장됐던 도시와는 다르다. 청년에게는 어르신들의 관심이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이웃에 공유된다. 가부장적 문화도 도시보다 짙게 남아있다. “서른 넘었으면 이제 시집이나 가야 한다” “여자니까 커피 좀 타와” 같은 성차별적인 발언이 오가기도 한다.
청년과 주민들은 한 발씩 양보하며 가까워진다. 채정연(35·전북 군산)씨도 귀농 직후에는 농촌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됐다. 젊은 아가씨가 혼자 밭에서 상추를 심고 있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구경하러 오기도 했단다. 어떤 날은 갑자기 집에 불쑥 들어와서 농작물을 주고 가기도 했다. 정연씨는 “처음엔 당황했는데, 가만 보니 어르신들이 애정을 주는 방식이었다”며 “그걸 알고 나니 더는 스트레스를 안 받게 됐다”고 말했다.
최고야(34·충북 청주)씨도 적당히 흘려듣고, 할 말은 하는 요령이 생겼다. “여자니까 커피를 타오란 말이 이상하긴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어르신이니까 커피 정도야 당연히 타드릴 수 있죠. 그러다가 선 넘는 성적인 발언을 하시면 웃으면서 ‘어휴, 요즘엔 그런말하면 큰일나요!’라고 되받아요. 그럼 어르신들도 ‘그래. 이제는 그러면 안 돼’하고 조심하세요.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잖아요. 같이 살아가려면 서로 이해해야죠.”
오미란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여성정책팀장은 “옆집 수저가 몇 개인지까지 다 아는 게 시골살이라고 하지만, 친근한 것과 사생활 보호의 간극을 잘 조율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말했다.
농촌살이에 익숙해져도 또래가 적어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 같은 공백을 채우기 위해 청년들은 ‘청년여성농업인협회’ ‘청년농업인협회’ 등 전국 단위의 조직을 만들어 교류한다. 줌(ZOOM)과 같은 온라인 프로그램으로 만나 독서, 요가 등 취미 생활을 같이하고 비슷한 작물을 키우는 사람끼리 농사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한다. 어려운 일에도 발벗고 나선다. 서진웅(26·경남 창원)씨는 “2년 전 농장에 불이 났을 때 전국의 청년농업인협회 회원들이 와서 청소와 뒤처리를 도와줬다”며 “전국 단위로 두레, 품앗이가 이뤄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농촌서도 어려운 내 집 마련
연고 없이 귀농·귀촌한 청년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당장 살 집과 농사지을 땅이다. 농촌이라고 ‘내 집 마련’이 쉽지만은 않다. 빈집이 많아도 살 만한 집은 적다. 2019년 농림축산식품부 ‘빈집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농촌 지역의 빈집 가운데 활용 가능한 곳은 31.3%(1만9206채)였다. 이마저도 집주인들이 잘 팔려고 하지 않는다. 소유자가 철거나 활용에 동의한 경우는 1만1920호로, 전체 빈집의 19.4%에 불과하다. 농촌의 부동산 매물이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 주택 거래는 부동산이 아닌 지인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청년들에게는 이 같은 네트워크도 부족하다.
농사를 지으려 해도 최소 백 평 단위의 땅이 필요하다. 평당 가격은 도시보다 낮지만, 대규모 땅을 마련하려면 억대의 돈이 필요하다. 땅 중에서도 토질, 위치 등을 고려해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을 골라야 한다. 하지만 외지인인 청년 농부는 이 마을에서 어떤 땅이 좋은 땅인지, 언제 매물로 나올지 등 정보를 알기 어렵다. 고급 정보는 주로 주민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공유되기 때문이다.
전남 무안에서 고구마 농사를 짓는 박융권(35)씨는 “나이가 비슷한 지인들과 같은 동네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싶어서 우리 마을의 땅을 알아봤는데 마땅한 곳도 없고 가격도 비싸 결국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 경우에도 청년 조직을 통해 도움을 주고는 한다. ‘청년농업인연합회’에서는 막 귀농한 청년이 도움을 요청하면 기존 회원들이 가격은 적당한지, 결격 사유는 없는 땅인지 함께 확인해준다. 임차를 하는 경우엔 계약서에 불리한 조건은 없는지도 검토한다.
결혼하고 자녀를 갖고 나서는 교육과 의료 인프라가 부족해 역귀농을 고민하기도 한다. 국토연구원이 지난 3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3493개 읍·면·동 지역 중 병·의원이나 약국 등 건강시설이 없는 곳은 88곳이었다. 아기를 낳으면 이 같은 인프라 부족은 더 큰 문제로 다가온다. 농촌에는 한의원, 정형외과, 치과 등 고령층이 자주 가는 병원이 주를 이룬다. 소아과, 산부인과처럼 청년층에 필요한 병원은 적다.
교육시설도 충분하지 않다.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는 도시보다 방과 후 수업의 선택지가 적다. 다닐 만한 학원도 마땅치 않다. 초등학생인 두 자녀를 둔 최고야씨는 “아이들이 사교육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뛰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농촌에 오긴 했지만, 막상 와보니 ‘이건 자유로운 게 아니라 방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장슬기 청년여성농업인협동조합 회장은 “농촌을 살리고자 한다면 수요가 적더라도 다양한 인프라를 구축해 청년들이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최지은 더나은미래 기자 bloomy@chosun.com
<글 싣는 순서> ①농부가 얼마나 멋진 직업인데요 ②할머니, 제 나이를 묻지 마세요 ③[농촌 청년 좌담회] 이런 정책 왜 없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