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목)

고장 난 자본주의 되살리려 ‘ESG’가 왔다

[인터뷰] ‘책임지는 경영자 정의로운 투자자’ 출간한 김민석 소장

‘책임지는 경영자 정의로운 투자자’를 펴낸 김민석 지속가능연구소장을 지난 8일 만났다. ESG의 뿌리와 원리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한준호 C영상미디어 기자

“고등학교 때 풀던 수학 문제를 떠올려 보세요. 공식만 외운다고 문제를 풀 수 있는 건 아니죠. 다 안다 생각했는데 막상 시험에서는 못 푸는 경우가 있어요. 제대로 알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에요. ‘ESG(환경·사회·지배구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식이 아닌 ‘원리’ 를 알아야 풀 수 있어요.”

지난 8일 만난 김민석(48) 지속가능연구소장은 최근 한국에 부는 ESG 열풍을 수학 문제에 비유해 설명했다. 엄청난 양의 기사와 정보가 쏟아지고 기업들도 앞다퉈 ESG 경영을 선언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모두 어려운 수학 문제를 받아든 표정이다.

김민석 소장이 이달 초 출간한 ‘책임지는 경영자 정의로운 투자자’는 자본주의의 맥락 속에서 ESG를 설명한 책이다. “ESG 점수를 잘 받는 기술이나 공식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에요. ESG의 뿌리와 원리를 짚어주는 책이죠.”

ESG는 ‘옳음’에 관한 이야기

―시중에 나와 있는 ESG 책과는 결이 좀 다른 것 같아요.

“ESG 위원회를 만들어라, 여성 이사 뽑아라, 인권침해 발생하지 않게 해라…. ESG 공식을 다룬 책은 너무 많아요. 그런데도 기업들은 여전히 어려워해요. 기업 사람들을 만나보면 ‘ESG 부서는 만들어 놨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해요. 큰돈 들여 컨설팅을 받았는데도 별 도움이 안 됐다는 기업도 있고요. ESG가 왜 생겨난 건지 그 뿌리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통해 ESG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었어요.”

―우리가 ESG를 오해하고 있나요.

“ESG가 최근에 새롭게 등장한 개념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요. ESG라는 용어가 공식석상에 등장한 게 2005년이에요. UNGC(유엔글로벌콤팩트)가 콘퍼런스를 주최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썼죠. 하지만 그 뿌리는 훨씬 이전부터 자라고 있었어요. 국제사회에서 논의되던 지속가능 경영, 지속가능 발전이 ESG의 뿌리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논의는 왜 시작됐나요.

“기업은 항상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경영을 해왔어요. 기업에 좋은 것이란 당연히 경제적 이익을 뜻하겠죠. 기업이 ‘옳은’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자꾸 택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환경문제와 인권침해가 발생했고 투명하지 않은 의사 결정이 이뤄졌어요.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영이 기업은 물론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게 되면서 논의가 시작됐어요.”

김민석 소장은 “고장 난 자본주의를 고칠 방법으로 등장한 게 바로 ESG”라고 말했다. 국제사회와 투자기관은 기업을 상대로 재무적 성과는 물론 ESG 성과를 요구하고 있다. ESG 성과가 나쁜 기업은 투자 리스트에서 빠지는 일도 벌어진다. 기업들이 ESG에 몰두하는 이유다.

책은 ESG의 주요 타임라인을 한 장의 도표로 보여준다. 재무적 성과만을 추구하던 기업이 ESG 경영을 선언하게 된 배경, 파타고니아 등 글로벌 기업이 펼치는 ESG 경영 사례, 폭증하는 ESG 채권과 펀드에 관한 이야기, 책임지는 올바른 거버넌스에 대한 철학적 성찰도 담아낸다.

―책 제목에 ESG라는 단어를 빼고 ‘책임’과 ‘정의’라는 키워드를 내세운 이유는 뭔가요.

“이 책은 ESG에 관한 책이기도 하지만 기업이 다시 ‘옳음’을 찾아가는 것에 관한 책이기도 해요. 기업이 옳은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책임’과 ‘정의’예요.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려면 우선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해요. 기업이 책임을 다하게 하려면 ‘압력’을 가하는 존재가 필요하죠. 투자자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어요. 그냥 투자자 말고 ‘정의로운 투자자’가 필요합니다. ESG 경영을 잘하는 기업이 있으면 소비자와 투자자가 그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줘야 해요. 정의로운 투자자가 늘면 책임지는 경영자도 늘어나게 될 겁니다. 그 과정을 통해 ‘옳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어요.”

ESG는 ‘수단’일 뿐 목표가 될 수 없어

김민석 소장은 대학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했다. 지난 20년간 대기업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부서와 ESG 관련 부서에서 근무하며 현장 전문가로 경력을 쌓았다. 현재는 이화여대, 한양대, 명지대, 경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속가능 경영, 사회적 책임, ESG 등을 연구하는 지속가능연구소도 운영한다.

―대기업, 중소기업, 공공기관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ESG 자문을 한다고 들었어요. 현장의 목소리는 어떤가요.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ESG 위원회’에 관한 질문이에요. 이사회 산하에 ESG 위원회를 만들긴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죠.”

―안 그래도 궁금했어요. ESG 위원회는 어떤 일을 합니까.

“주식회사의 3요소는 주주, 이사회, 감사입니다. 큰 기업의 경우 주인인 주주가 몇백만 명이 되기도 하죠. 이사회는 주주들을 대신해 기업을 경영합니다. 이사회가 경영을 잘못할 수도 있으니 감사를 둬서 감시와 견제, 모니터링을 하죠. 이사회 산하에 ‘ESG 위원회’를 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입니다. ESG 위원회는 ESG와 관련된 모든 것을 보고받고 결정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이 해외에 공장을 설립한다고 가정해 볼게요. ESG 위원회는 공장의 설립으로 현지에서 환경 파괴가 일어나지는 않는지, 원주민 피해는 없는지, 인권침해가 발생하진 않는지 이런 걸 따지게 됩니다. 과거에는 이사회에서 노동력이 풍부한지, 인건비가 싼지 이런 걸로 공장 설립을 결정했다면 이제는 비재무적인 것을 고려해 결정하게 되는 거죠.”

―굉장히 어렵고 전문적인 일이네요.

“그럼요. 지금은 성별이나 연령대 등 ‘다양성’을 고려해 ESG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지만 조만간 위원들의 ‘전문성’이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거예요.”

―자칭 ‘ESG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많던데요.

“한국에 ESG가 등장한 게 3년이 안 됐어요. 그런데 그 사이 엄청나게 많은 전문가가 생겼어요. 서점에 가면 ESG 책이 넘쳐나고 ESG 컨설팅을 해준다는 곳도 많아요. 이 많은 전문가가 다 어디서 나온 걸까요. 초보 운전자가 다른 사람의 운전을 알려주는 꼴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김민석 소장은 “ESG는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 ‘목표’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ESG가 너무 ‘핫’ 해지면서 ESG를 목표로 착각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죠. 많은 기업이 지속가능 업무를 담당하던 조직을 유행처럼 ESG 조직으로 바꾸고 있어요. ESG가 아니라 ‘지속가능성’이 핵심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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