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목)

70년대까진 도움 없인 못 사는 나라… 88올림픽 이후 도움 주는 나라로

6·25전쟁 후 국제 NGO에서 아동구호 손길, 60~70년대엔 지역·가정 개선사업으로 전환,
90년대, 원조 ‘홀로서기’… 토종 NGO 생겨나…

‘탯줄도 잘리지 않은 아기들이 밤새 항구에 버려져 있어요.’

자료: 한국은행‘국민계정
자료: 한국은행‘국민계정

6·25전쟁이 치열하던 1950년대 초반. ‘세이브더칠드런’ 한국사무소 직원이었던 박미자씨가 세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쓴 글이다. 전쟁 기간 중 남쪽 사망자만 50만명을 넘었고, 행방불명된 사람을 합하면 그 숫자는 80만명을 넘어선다. 주택 61만채가 폐허가 됐고, 760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한국전쟁피해통계집). 해방 직후 어렵게 지켜온 산업 기반시설은 모두 붕괴돼 재건이 불가능해 보였다. 공업시설의 43%, 발전시설의 41%, 철도 312km가 파괴됐다.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 하지만 가장 힘든 이는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아동의 피해가 컸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가족과 헤어진 아이만 10만명에 달했다. 남북한 전체 인구가 3000만명 남짓했던 시절이다. 이런 처참한 현실 속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재건의 씨앗을 마련한 이들이 바로 국제 구호단체들이다. 이들은 열정적으로 한국의 상황을 해외에 알리고 적절한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국의 거리에서 만난 거지 소년이 들고 있던 깡통과 한국에서 찍은 영상을 시애틀의 교회에서 보여주며 한국 돕기를 제안했던 에버렛 스완슨 목사 같은 이도 있었고, 부산 용주동에 방 2개짜리 사무실을 구하기 전까지 길거리에서 잠을 잤던 로버트 세이지씨 같은 이도 있었다.

구호사업의 초기인 1950~60년대에는 아동 구호사업이 구호 NGO의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세이브더칠드런’ 영국·미국 지부는 매년 3500명의 한국 아동들을 후원했고, ‘플랜’의 후원자들은 한국의 아동들에게 쌀·밀가루와 서양 의복 등을 보내왔다. 당시 문서에는 “아이들이 처음에 서양식 옷을 입으려 하지 않았으나, 추위를 피하기 위해 결국 태도를 바꾸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월드비전’ 또한 1951년부터 결연사업을 실시해 한 후원자당 매달 10달러씩을 한국의 고아들에게 보내왔다. 1953년은 한국 국민들이 67달러로 1년을 나던 시절이다. ‘컴패션’은 1952년 1000달러로 삼척군 북평리에 집을 사서 신애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웠다. 한국에서의 첫 사업이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1963년 ‘컴패션’이 후원한 한국의 아이들은 1만8120명으로 늘어난다. 1948년 어린이 400명을 원조했던 ‘어린이재단’은 10년 후 1만696명을 원조했다. 1951년 46명을 결연후원하던 ‘월드비전’은 10년 후 1만8900명을 지원했다.

1950년대

6·25전쟁 후 한국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A Far Cry’의 한 장면. /세이브더칠드런 제공
6·25전쟁 후 한국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A Far Cry’의 한 장면. /세이브더칠드런 제공

눈앞에 보이는 아이들과 환자들, 그리고 전쟁 미망인들을 시설에 수용해 돌보기에도 손이 모자랐던 50년대가 저물어가면서 한국 구호사업의 축은 재건을 위한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생존의 단계를 벗어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피어났다. 1963년 ‘CCF한국위원회(어린이재단의 전신)’는 시설에 있던 아이들을 일반 가정으로 돌려보내고 가족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1963년 서울 서소문에 개설된 ‘아펜셀라 어린이회’를 필두로 1967년에는 ‘아펜셀라 어린이회’ 14개 분실이 설립된다. ‘어린이재단’ 김원진(50) 사무총장은 “단순히 어린이 하나하나만을 지원하던 관행을 벗어나 어린이를 매개로 가정과 지역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싹텄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당시를 설명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1962년부터 지역사회복리회의 이름으로 농촌지역 개발사업을 시작했고, ‘플랜’은 1968년에 백령도에서 도서(島嶼) 프로그램을 정착시키고 거제도와 대구시 주변의 지역에서도 프로젝트를 추가했다. ‘월드비전’은 1974년 성남시에 사회복지관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가정 개발 사업의 영역을 확대해갔다. 현재의 지역아동센터 사업과 종합사회복지관 사업의 원형이 10년 사이에 출현한 것이다.

1960년대

1962년 서울시 구로동. 식수사업으로 우물을 마련했고 연립식 주택을 지어 주거환경을 개선했다. /플랜코리아 제공
1962년 서울시 구로동. 식수사업으로 우물을 마련했고 연립식 주택을 지어 주거환경을 개선했다. /플랜코리아 제공

경제가 성장하면서 직업보도소 사업도 활기를 띠었다. 부산 금정구 두구동에 설치했던 ‘세이브더칠드런’의 직업보도소는 1965년 6월 신축 개원한 이래 8년간 700명의 소년들에게 전기 및 기계 교육을 제공해 이들을 금성사(현 LG전자) 등의 기업에 취업시켰다. ‘월드비전’은 시설에서 떠나야 하는 18세 이상 청소년들의 직업교육을 위해 1959년부터 직업보도소를 세워 1980년까지 2억원을 투자했다.

여기에서 직업교육을 받은 8652명의 청년들은 최초의 수출산업공단인 구로1단지와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건설 역군의 역할을 담당했다.

1970년대

청년들과 학생들이 대전의 직업보도소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다. / 월드비전 제공
청년들과 학생들이 대전의 직업보도소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1974년 보건사회부의 예산은 103억8200만원. 같은 해 해외에서 들어온 원조금액 151억1600만원보다 적었다. 당시 복지와 개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과정에서 해외에서의 원조가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80년대 들어 구호NGO들은 본격적으로 지역개발사업에 나섰다. ‘월드비전’은 1981년 4월 강원도 평창의 조둔·다수·회동리를 시작으로 강원도 춘천, 전남 해남과 고흥, 경남 산청, 충북 제천, 강원도 영월과 경남 밀양, 경기도 남양주 등에서 지역개발사업을 펼쳤다. 상수도 공사, 도로 확장공사를 필두로 화장실 개량 사업, 주민 예방 접종 사업, 구충제 투약 사업 등을 실시하고 식수에 염분과 석회질이 많은 지역에선 식수 개발사업을 벌였다. 이런 사업들은 정부가 펼치고 있던 성장 정책과 맞아떨어져 소득증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8년 143달러에 불과하던 1인당 GNP가 1978년 1000달러를 넘었고, 1983년엔 2000달러를 넘어섰다. 빈곤을 벗어나 발전으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가 조금씩 마련되기 시작한 셈이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경제의 성장은 86년 아시안 게임, 88년 올림픽 게임을 유치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89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5556달러. 이미 88년에 OECD 가입을 권유받을 정도로 ‘잘사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 시점을 전후로 한국을 지원하던 해외의 단체들은 한국 지원사업을 종결한다. 한국보다 더 힘들게 사는 나라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한국 구호단체들의 자립이 시작된 것이다. ‘플랜’은 1979년 자신들이 운영하던 ‘양친회병원’을 국내에 기증하고 한국 지원사업의 종결을 선언했다. 이후 ‘플랜’은 1996년 1월 모금을 위해 한국을 다시 찾게 된다. 1986년 ‘CCF’는 한국지원을 종결했다. 이후 ‘CCF한국위원회’는 오늘날의 ‘어린이재단’이 될 기틀을 닦기 시작한다.

한국을 후원하기 위해 들어왔던 NGO들이 국내에서 ‘자립’을 준비하는 동안, 한국에서 모금을 해 더 어려운 나라를 돕기 위한 모금 단체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이 때문에 ‘기아대책’은 1989년 10월 창립 이후 설립 허가가 날 때까지 산통을 겪었다.

“기관 등록을 하는데 다들 아리송하게 생각해서 외무부와 보건사회부를 오간 지 9개월이 되도록 허가를 못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9개월 만에 당시 보건복지부 김용래 장관이 저를 부르시더니, 일이 늦어져 미안하시다는 겁니다.” 정정섭(70) 기아대책 회장은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해냈다.

어렵게 설립된 덕분인지 ‘기아대책’은 처음부터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설립 첫해에 1억8000만원을 모금해 에티오피아·케냐·방글라데시·페루 등 7개국에 15만달러를 지원한 것이다. 우리나라 민간 해외 원조의 첫 사례다.

2000년대

2008년 굿네이버스의 차드 식수개선사업 후 현지 어린이들이 샤워를 하고 있다. /굿네이버스 제공
2008년 굿네이버스의 차드 식수개선사업 후 현지 어린이들이 샤워를 하고 있다. /굿네이버스 제공
국내 모금을 통해 아프리카의 니제르에 염소 보내는 캠페인이 시작됐다. /세이브더칠드런 제공
국내 모금을 통해 아프리카의 니제르에 염소 보내는 캠페인이 시작됐다. /세이브더칠드런 제공

한국의 경제력에 힘입어 순수 토종 NGO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1991년엔 ‘굿네이버스’가, 1998년엔 ‘굿피플’과 ‘지구촌나눔운동’이 태어났다. 이들 단체들은 개인이나 기업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국내의 소외계층을 위한 사업을 벌이거나 국제 구호활동을 벌였다. 창립 당시 8명의 직원과 128명의 후원자로 시작했던 ‘굿네이버스’는 불과 20년이 흐른 2010년 현재, 전 세계 26개국 134개 사업장에서 1366명의 직원과 44만명의 후원 회원이 함께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한국 해외원조의 역사와 함께 삶을 살아온 김혜자씨는 서신을 통해“나는 언제나, 희망이 어려움을 극복해준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슬픔의 유일한 치료제는 나눔입니다”라고 말했다. /월드비전 제공
한국 해외원조의 역사와 함께 삶을 살아온 김혜자씨는 서신을 통해“나는 언제나, 희망이 어려움을 극복해준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슬픔의 유일한 치료제는 나눔입니다”라고 말했다. /월드비전 제공

국내 구호 NGO는 현재 동남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의 총 44개 국가에서 구호와 재건사업을 하고 있다.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월드비전’의 박종삼(75) 회장은 “불과 60년 만에 이만큼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감격스러워 했다.

2009년 11월 25일에는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의 2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1961년 OECD 출범 이후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공여국으로 지위가 뒤바뀐 최초의 사례이다. ‘굿네이버스’ 이일하 회장(63)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더 많은 기대를 받고 있고, 더 많은 책임을 부여받았음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지났고 어느덧 우리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도 온 셈이다.

고대권 기자

신보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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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호 202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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