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사회혁신발언대] 베트남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들에게

최유리 프로젝트 꿍 대표

올해로 12년째 베트남 하노이에 살고 있다. 처음엔 한국 단체 소속된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로 파견됐고, 베트남에 정착한 이후엔 여러 한국 기관들의 지원사업 프로젝트 매니저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하노이의 사회적경제 생태계에 발을 딛게 되었고, 훌륭한 현지 사회적기업가들과 인연을 맺게 됐다. 동료를 넘어 친구가 된 이들은 베트남에서 하는 나의 여러 활동을 함께 해주고 도와주는 든든한 ‘백’이 됐다. 그리고 지금은 현지 활동가들과 함께 교육, 예술, 장애, 여성, 환경 등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다양한 ‘작당 모의’를 해오고 있다.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을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물론 그중엔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진심으로 베트남 사회에 기여하려는 훌륭한 기업도 있지만, 아쉽게도 베트남 현지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기획을 갖고 오는 곳도 많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 기금을 따내기 위한 일회성 사업을 마치고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이런 ‘문제적 기업’ 가운데 스스로를 ‘사회적기업’으로 칭하는 기업들도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베트남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없고, 현지 문제 해결에 기여를 하지 못하는데도 이들은 자신을 사회적기업으로 당당하게 소개한다. 이들이 내건 사업 목표에 ‘베트남의 취약계층과 함께한다’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취약계층이라는 단어는 베트남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장애인, 소외 지역에 사는 청소년, 한국에서 돌아온 귀환 결혼 이주 여성, 한국인 핏줄이지만 버려진 아이들, 농어촌 빈곤층, 성별, 지역, 직업 등에 따라 각자의 특수성을 가진 사람들이 ‘취약계층’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진다. 현장의 정확한 문제 파악이나 해결법에 대한 큰 고민 없이 쓰이는 ‘취약계층 돕기’라는 말이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많다. 한국보다 못 사는 나라라는 이유만으로 베트남의 사회·문화적 특성이나 사람, 지역 간 차이에 대한 이해 없이 일반화되어 쓰일 수 있는 만능 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런 회사에 소속돼 베트남에서 일하면 내게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 안정적인 수입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뜻 손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기업의 활동이 그들이 제안서에 썼던 것처럼 베트남의 취약계층에게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들지 않거나, 문제 해결 과정이 정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면 그 손을 잡는 것이 두려워진다.

베트남 사회적기업에 직접 연락하는 한국 사회적기업은 점점 늘고 있다. 때로 이런 한국 기업 가운데에는 베트남 사회적기업들에게 ‘사회적기업도 기업’이라거나 ‘비즈니스가 먼저’라는 식으로 설명하면서, 협력하면 돈(기금)을 벌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적기업이 이들을 찾는 이유는 대부분 한국 정부나 기업에서 국제 사회적경제 사업이나 한국 사회적기업의 사회 진출을 지원해주는 사업에 참여해 기금을 따야 하는데, 사업을 하려면 현장을 잘 아는 현지 조직과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간혹 경제적으로 고전하는 베트남 사회적기업들이 이런 제안에 혹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국 기업의 제안에 곧바로 응답하지 않는다. 사업성을 앞세우다가 조직이 지켜온 가치가 퇴색될까, 조직의 본질적 목표와 상관없는 사업을 하다 조직 몸집은 커졌는데 정작 목표한 사업을 할 역량은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사회적기업이 기금 사업에 소극적인 이유는 이곳 사회적경제 활동가들은 ‘자생력’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과는 달리 베트남 정부나 지자체에선 사회적기업이라고 특별한 지원이나 혜택을 해주는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장애인을 고용하거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사회적기업으로 규정하지 않는 곳도 많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곳은 어느 정도 실력과 진정성을 입증한 셈이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을 ‘정말 하고 싶은 사람들’만 하게 된 구조다. 이런 상황이니 기금이나 후원을 따내기 위해 사회적기업을 가장하는 곳도 당연히 없다.

물론 국제사회의 지원과 연대는 반갑다. 문제는 이들이 바라고 필요로 하는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트남의 동료들은 “눈앞의 사업을 키울 돈보다는 생태계가 자랄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지원 없이 자신들끼리 연대해온 문화와 역사를 지키고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지원을 원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일할 공간’이다. 하노이의 경우 인건비 등 일반 물가에 비해 임대료가 아주 비싸서 많은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임대료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람 많기로 유명한 하노이 도심의 인구 밀도보다 사회적기업 사무실의 인구 밀도가 훨씬 높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또 하나는 인건비 지원이다.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하는 젊은 인재 중엔 학력이 높거나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많지만, 조직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임금 수준이 낮다. 젊은 베트남 인재가 사회적기업을 통해 꿈을 이루고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려면 인건비와 공간 지원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베트남 사회적경제의 가장 큰 힘은 무엇보다 진정성 있게 일구어 온 그 실력, 그리고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끈끈한 연대다. 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스스로 만들어온 생태계가 계속 유지되도록 지원해주는 게 가장 좋다. 돈에 흔들려 가치를 포기하거나, 임대료 때문에 필요한 활동을 못 하는 일이 없도록 ‘판’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베트남 사회적기업가들과의 협력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우리 사회적기업의 진출을 위한 지원보다 베트남 현지 활동가들이 일할 수 있는 ‘혁신센터’를 지어 주면 어떨까? 진정성과 실력을 갖춘 베트남 청년들이 혁신센터에 모여 베트남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말이다. 상상만 해도 신나는 장면이다.

최유리 프로젝트 꿍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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