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비영리단체 이사회
명망가들 구성서 탈피, 다양성 추구
거수기 역할 아닌 자문·활동 동시에
여성 비율 여전히 20%… 변화 더뎌
인권 옹호 단체인 국제앰네스티 한국 지부가 지난 6일에서 9일까지 열린 총회에서 회원으로 활동하던 22세 김지나씨를 ‘유스(Youth) 이사’로 선임했다. 김 신임 이사는 국제앰네스티 한국 지부의 청소년·청년 대표인 유스 대표로, 활동을 해온 회원이다. 신민정 국제앰네스티 한국 지부 이사장은 “우리 단체는 14~24세 회원을 유스 이사로 선임하고, 국제 네트워크에도 이사장과 함께 참석하게 한다”면서 “청년 목소리가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국제앰네스티의 이사회 구성원은 기업인이나 유명인 등 명망가가 아닌 단체 회원 출신이 대부분이다. 평이사 8명은 물론이고, 지난해부터 이사장직을 맡은 신민정 이사장도 국제앰네스티에서 10년간 활동한 회원이다. 국제앰네스티 관계자는 “국제앰네스티는 회원 멤버십에 기반한 단체이고, 국제 네트워크도 이를 살린 이사회를 꾸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서 “회원과 이들을 대변하는 이사회가 단체 활동 방향을 정하면, 사무처가 전문성을 갖고 사업을 수행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다양성 있는 이사회로
국내 비영리단체 이사회가 변하고 있다. 과거 비영리단체 이사회는 설립자와 친분이 있는 명망가들로 구성돼 사실상 단체 대표나 사무국이 올린 안건에 대한 거수기 역할만을 하는 등 단체의 구체적 활동 방향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됐다. 일부 명망가는 단체 이사직을 수집하듯 여러 단체에 이름을 올려놓기도 했다. 그러나 기부자나 회원들 인식이 높아지면서 조직 예산과 사업 방향, 인사권 등에 영향을 미치는 이사회의 구성에 신경을 쓰는 단체가 늘어나는 추세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다양성’이다. 이사회가 단체 사무국, 기부자, 수혜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소통하며 단체의 활동 방향을 정할 수 있도록 종전에는 이사회에 포함되지 않았던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불러들이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아름다운가게’다. 이곳은 지난 2017년부터 실무자인 ‘간사’와 ‘자원봉사자’를 이사회에 포함하도록 정관을 바꿨다. 김원섭 아름다운가게 정책실장은 “시민 참여를 통한 자원 순환이라는 목표를 가진 우리 단체의 취지에 맞춰 이사회 구성을 바꿨다”고 말했다.
국제개발협력단체들의 연대체인 KCOC도 이사회 개편을 통한 다양성 확보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 25일 정기총회를 열고 신임 회장과 이사 단체 선임을 완료한 KCOC는 신규 이사 단체로 기쁨나눔재단, 한국국제봉사기구, JTS, 태화복지재단 등을 선정했다. 종전 KCOC 이사진이 대규모 단체에 집중된다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에 체질 개선에 나섰다는 평가다. KCOC 관계자는 “몇 년 전부터 이사진에 소규모 NGO 참여를 늘렸고, 대표자 성별까지 고려해 이사진을 구성했다”면서 “이 밖에도 국제개발 내의 활동 분야, 종교성 등 다양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고 말했다. 한국국제봉사기구는 울산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단체로 대표자가 여성이고, 기쁨나눔재단은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주목도가 떨어지는 심리 지원 활동에 적극 나서는 단체다.
다음세대재단은 ‘일하는 이사회’를 만드는 대표적 단체다. 다음세대재단 이사진은 정재승 카이스트 뇌공학과 교수 등 총 7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사회가 열리면 실무진과 이사진이 마주 앉아 단체 활동에 대해 격의 없이 토론하고, 이사진은 전문성을 살려 구체적인 자문에 응하거나 활동에 참여하면서 역할을 하고 있다. 방대욱 다음세대재단 대표는 “우리 이사진에는 ‘거수기’ 역할만 하는 이사는 없다”면서 “이사진 모두 실무자만큼 단체 사정에 밝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대형 단체도 변화 조짐
상대적으로 이사회 구성이나 역할에 관한 변화가 더딘 것으로 알려진 대규모 단체들 사이에서도 변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 더나은미래는 지난달 23일부터 지난 2일까지 약 일주일간 비영리단체인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국내 비영리단체 중 개인 기부금 모금액이 가장 많고 대중 기반 복지나 구호 활동 등을 펼쳐 중요도가 높다고 생각되는 단체 10군데를 선정해 이사회 구성과 역할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에는 ▲굿네이버스 인터내셔널 ▲밀알복지재단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세이브더칠드런 ▲어린이재단 ▲월드비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플랜한국위원회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한국컴패션(가나다순) 등 10곳이 참여했다.
지난해 10단체 평균 이사회 개최율은 4.1회(서면 이사회 제외)로 나타났다. 지난 2016년 아름다운재단 연구 결과 전체 비영리단체의 연간 이사회 개최 횟수는 3.5회였다. 전현경 아름다운재단 전문위원은 “코로나로 대면 모임이 어려웠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단체들이 이사회 소집에 적극적이었던 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사진 대상 교육도 비교적 적극적으로 열린 것으로 분석됐다. 10곳 중 이사진에 대한 정기 교육이 없다고 답한 곳은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두 곳이었고, 나머지 단체에서는 필요에 따라 신임이나 기존 이사진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특히 교육 측면에서 두드러진 곳은 월드비전이었다. 박인수 월드비전 본부장은 “국제 월드비전 기준은 1주간 집중 이사회를 진행하는 것이지만, 한국 문화 특성상 어려운 점이 있어 이사진이 연 1회 현장 사업장을 방문하도록 해 단체 활동을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변화가 더딘 분야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이사회 내부의 성비다. 10단체 이사진 총 89명 가운데 여성은 20명으로 전체의 20%에도 못 미쳤다. 여성 비율이 가장 높은 단체는 유니세프한국위원회(9명 중 4명), 세이브더칠드런(11명 중 5명), 월드비전(13명 중 5명) 순이었다. 여성 이사가 한 명도 없는 단체는 플랜한국위원회, 굿네이버스인터내셔널이었다. 한국국제기아대책, 한국 컴패션에는 여성 이사가 1명씩 포함됐다.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는 “단체의 활동 목적과 그를 달성하는 데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이해하고 실제 그 역할을 다하는 게 좋은 이사회”라며 “이를 위해 단체에서 사무국과 이사회의 역할을 명확히 규정하고, 이사진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황 이사는 “다만 국내 거대 비영리단체 대부분이 오래전에 설립돼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기부금 모집에 도움이 되는 명망가나 독지가로 구성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단체 처지에서도 오래된 이사진을 교체하거나 운영 관습을 바꾸기 어려운 점이 있다”면서 “이사회 변화 노력은 이제 시작하는 단계로, 단체의 지속 가능성 확보를 위해 더욱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