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아무튼 로컬] 규모의 경제 아닌 ‘범위의 경제’로… 로컬 기업의 새로운 경제 문법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

강원도 강릉역 근처에서 50년 된 낡은 여인숙을 수리해 ‘위크엔더스’라는 숙박 공간을 운영하는 한귀리씨. 공식적으로 그의 사업체는 하나지만 제공하는 서비스를 보면 숙박 외에도 리트리트 프로그램, 로컬푸드와 음료, 요가와 명상, 소셜미디어 디자인 등 각각 별도 사업체로 꾸려갈 법한 일들이 줄잡아 네댓 가지다.

서울에서 잘나가는 방송국 피디로 일하던 그가 서핑과 요가에 매료돼 발리와 치앙마이, 그리고 강원도 동해안을 제집처럼 오가다 결국 회사를 팽개치고 공간 창업자로 강릉에 정착한 건 지난해 6월. ‘stay & more’를 표방하는 위크엔더스의 진가는 사실 ‘stay’보다는 ‘more’에 있다. 호텔이나 여관처럼 그저 잠자리만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강릉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뭔가 색다른 경험을 주기 때문이다.

손님들 역시 잠만 자러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위크엔더스에 짐을 풀고 리트리트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여행자들은 강릉의 푸른 바다와 솔향기 가득한 숲에서 서핑과 요가, 명상을 함께하고 저녁에는 다른 여행자들과 루프톱 파티를 즐기며 아침에 일어나 강릉식 로컬 푸드로 해장을 한다. 한씨는 자신의 공간을 ‘커뮤니티 호스텔’이라고 정의한다.

이처럼 로컬 창업자들의 사업 모델은 한 업종에 특화해 비용을 줄이고 매출을 늘려 ‘규모의 경제’ 효과를 누리는 기존의 경영 방식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로컬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서비스를 함께 제공함으로써 연구 개발 및 판매 비용은 줄이는 대신 매출 효과는 극대화 하는 ‘범위의 경제(economy of scope)’ 원리가 더 잘 먹힌다. 세계화-산업화 시대에 제조업체들이 ‘단품종 대량생산’으로 가격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탈세계화-탈물질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후기 산업사회에선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해줘야 버틸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다 보니 통계청 산업 분류로는 어느 한 항목에 속하지 않고 모호하게 여기저기 걸쳐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배타적 소유보다 공유와 체험, 공감과 연결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소비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다양한 경험이 집적돼 있는 곳을 선호하고 그곳엔 ‘커뮤니티’가 만들어진다. 요즘 로컬의 독립서점에 가면 어김없이 북토크나 글쓰기 모임이 있고, 카페에 가면 한편에 지역 디자이너들의 굿즈를 모은 편집숍이 있고, 식당에 가면 지역 농부들이 생산한 신선 재료를 즉석에서 요리해 맛보는 ‘팜 투 테이블’ 모임이 있다. 어딜 가든 ‘복합’ 문화 공간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창업자들은 자신의 콘텐츠를 기반으로 열린 플랫폼을 지향한다. 자신과 결이 맞는 다른 창업자와 연대해 협업의 가치사슬을 계속 확장해 간다. 그게 소비자 취향에도 맞고 비용 대비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는 지방 소도시나 농·어·산촌 지역은 한 가지 제품이나 서비스만으로 승부를 보기엔 시장이 너무 작다. 창업자 입장에서는 무리하게 특정 제품에 올인하기보다는 ‘범위의 경제’ 원리를 적용해 적은 비용으로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함으로써 그 지역의 얼마 안 되는 수요를 원스톱으로 끌어모아 매출로 연결 지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만물상’ 방식의 로컬 기업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이를테면 마을버스를 운영하는 회사가 출퇴근 시간에는 통학-통근 서비스를, 그 일을 마치면 택배를, 그리고 택배 간 김에 독거노인 돌봄 서비스도 제공하는 방식이다. 전형적인 ‘범위의 경제’ 모델이다. 달라진 소비자 취향, 인구 감소 시대 공공 서비스의 공급 부족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새로운 로컬의 경제원리인 셈이다.

로컬의 창업자들은 자신이 현실의 화폭에 한 땀 한 땀 찍어가는 작은 점들을 잇고, 이를 지역의 다른 창업자가 찍어가는 또 다른 점들과 이어가면서 새로운 그림을 그려간다. 그 점들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시장에서의 가치 평가도 달라진다. 영국 버진그룹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이 말하는 성공한 기업의 A-B-C-D(Always-Be-Connecting-Dots) 원리다. 전통적 틀을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점들을 연결하면 같은 점들에서 완전히 새로운 서비스가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혁신이라고 부른다.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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