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토)

“뇌병변 1급 우리 아이에게 생애 첫 청바지가 생겼어요”

뇌병변장애인 맞춤 의류리폼 지원
보조공학사·베테랑 재단사와 상담
체형·취향 반영한 ‘나만의 옷’ 제작

이상종 재단사가 장애인 의류리폼 지원 캠페인 참가자의 신체 치수를 재고 있다(왼쪽 사진). 보조 기기를 손쉽게 착용할 수 있게 발목 부분부터 무릎까지 트임을 넣은 청바지. /유니클로

뇌병변장애 1급을 앓는 고명석(14)군은 항상 여성용 레깅스를 입고 다녔다. 키 140㎝, 체중 20㎏의 작은 체구. 왼쪽 다리엔 발목부터 무릎까지 오는 보조기기를 착용하고 있어서 기성복이 맞질 않았다. 보조기기 때문에 바지 밑단도 늘 잘라내야 했다.

그 흔한 청바지 하나 없던 고군에게 지난해 여름 새 바지가 생겼다. 한국뇌성마비복지회가 유니클로의 지원으로 진행하고 있는 ‘장애인 의류리폼 지원 캠페인'(이하 리폼 캠페인)에 참여하면서다. 리폼 캠페인은 스스로 몸을 움직이기 힘들고 신체 일부가 굳거나 변형된 뇌병변장애인들에게 맞춤형 의류를 제공한다. 고군은 단추 안쪽에 지퍼를 달아 입기 쉽게 리폼한 셔츠와 기저귀가 안 보이도록 밑위를 길게 덧대고, 보조기기를 착용할 수 있도록 무릎부터 발목까지 트임 지퍼를 단 청바지를 받았다. 고군 어머니는 “우리 애가 청바지를 입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며 “가는 곳마다 ‘그 옷 어디서 샀느냐’며 부러움을 산다”고 했다.

장애인 옷 수선, 까다롭고 복잡해 수선집도 거절

뇌병변장애란 뇌성마비나 뇌졸중 등으로 인해 신체 일부가 마비되는 장애를 말한다. 지난 19일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국내 뇌병변장애인은 2019년 기준 25만2000명이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장애 정도나 가정환경에 따라 직업훈련이나 보조공학기기 등은 제공하고 있지만, 의류 문제는 철저히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다.

장애인에게 옷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다. 스스로 옷매무새를 고치거나 자세를 바꿀 수 없는 장애인들에게 불편한 옷은 고통 그 자체다. 그렇다보니 곁에서 옷을 챙기는 보호자도 옷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옷을 고쳐 입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비용이 일반 수선의 10배 이상 드는 데다, 그마저도 받아주는 수선집이 거의 없다. 리폼 캠페인을 총괄하는 김지현 보조공학사는 “일반 수선은 10분이면 끝나는데, 장애인 옷 수선은 까다롭고 과정도 복잡해 최소 서너 시간은 걸린다”며 “이 때문에 많은 장애인이 신축성이 좋은 레깅스나 트레이닝복을 입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리폼사업의 씨앗은 보호자들이 먼저 뿌렸다. 지난 2016년 서울시 디자인거버넌스 사업을 통해 보호자들이 ‘뇌병변장애인용 의류 디자인 가이드북’을 만들면서다. 가이드북을 전달하면 동네 수선집에서도 리폼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수익성이 낮아서 안 된다”였다. 막막해진 보호자들이 전문 기관인 한국뇌성마비복지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때마침 ‘옷으로 하는 사회공헌’을 함께할 파트너를 찾던 유니클로가 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키우기로 했다. 2018년 12월부터 두 기관이 논의를 시작했고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이 추진됐다.

리폼 캠페인은 장애인과 보호자가 겪던 옷 관련 어려움을 모두 해결하는 게 목표다. 신체 특성, 보호자 요구, 심미성이나 취향까지 고려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옷’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작업은 당사자와 보호자와의 1대1 상담을 거친다. 리폼할 옷을 선택하고 치수를 재고, 당사자와 보호자가 요청 사항을 보조공학사, 재단사와 상담한 후 옷에 들어갈 디자인과 기능을 결정하는 식이다.

개인 체형과 취향에 맞춘 리폼… 장애 당사자·보호자 ‘만족’

작업은 경력 20년 이상의 베테랑 맞춤 의류 재단사가 맡는다. 서울서남보조기기센터에서 리폼을 담당하는 이상종(66) 재단사는 “경력 50년이 넘는데 이 작업 난도는 최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들은 키는 큰데 아주 말랐거나 어깨가 좁은 식으로 비장애인 체형과 달라 리폼할 때 옷을 전부 다 뜯어서 다시 박음질해야 한다”며 “옆구리, 겨드랑이, 몸통까지 재서 맞추다보니 일반 옷의 다섯 배 이상 품이 든다”고 말했다. 공들여 작업하지만 예상치 못한 불만이 나오기도 한다. 그땐 최대한 A/S를 해준다. “한번은 청바지를 고무줄 바지로 바꿨는데, 얼마 후 보호자를 통해 고무줄이 굵어 휠체어에서 움직이기가 불편하다는 피드백이 왔어요. 다시 가는 고무줄과 원단으로 교체해드렸죠.”

장애인 옷이라고 해서 기능성만 중시하는 건 아니다. 장애 당사자와 보호자들도 상황에 맞는 세련된 옷을 원한다. 이 때문에 흔히 입는 티셔츠는 물론 격식 있는 자리에서 입는 셔츠까지 리폼한다. 셔츠는 단추 안쪽에 지퍼를 달아 입기 쉽게 만든다. 팔이 구부러진 채 굳은 사람들을 위해 겨드랑이나 팔목 등 팔 안쪽에 지퍼를 달거나 망토처럼 만든 후드집업도 있다.

작업마다 개인마다 다른 체형과 취향을 맞추느라 담당자들은 머리를 싸맨다. 이 재단사는 “집에서도 디자인을 고민하다 꿈까지 꾼다”면서도 “수혜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힘이 난다”며 웃었다. “정장을 맞춰 처음으로 가족 결혼식에 참여했다는 분, 깔끔한 셔츠를 입고 반장 선거에 나갔다는 학생, 만날 때마다 옷을 가리키며 손을 흔드는 분…. 기억나는 분이 너무 많아요.”

한국뇌성마비복지회는 리폼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장애를 보는 시각이 넓어졌다고 했다. 복지회 측은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취향과 욕구가 있는 ‘개인’으로 보고, 복지 서비스도 이들이 생존을 넘어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걸 이 사업을 진행하며 깨달았다”고 했다.

유니클로도 올해 지원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의 경우 서울 지역 400명을 대상으로 캠페인을 펼쳤는데, 올해는 800명에게 리폼 옷을 지원할 예정이다. 사업지도 부산까지 확대한다. 이미 전국 각지에서 “우리 지역에서도 해달라”는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리폼 캠페인에 참여한 1급 뇌병변장애인 최아람씨의 어머니는 “만족도가 100%를 넘어 1000%”라고 말했다. “서른이넘도록 아동용 옷만 입던 딸이 성인다운 옷을 입은 걸 보니 날아갈 것 같아요. 입을 수 있는 옷만 입히다가, 옷을 고르는 재미도 처음 느껴봤어요. 이런 기쁨을 모르고 사는 장애인과 보호자가 아직도 많고, 이런 옷은 다른 곳에선 돈을 줘도 못 구하니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부디 이 캠페인을 꾸준히 해 주면 좋겠습니다.”

[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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