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실명예방캠페인 ‘오픈 유어 아이즈’ (Open Your Eyes)] ③국내 저시력 사업

흐릿한 세상 ‘사랑의 빛’ 절실
저시력 인구 5만7000명 독서확대기 보급 수 7년간 고작 2310대
전문교사 턱없이 부족해 “지도방법 터득할 길 없어”

저시력 아동이 탁상용 독서확대기를 사용하는 모습. /하트하트재단 제공
저시력 아동이 탁상용 독서확대기를 사용하는 모습. /하트하트재단 제공

“작은 글씨는 아예 안 보이고 물건 형체는 흐릿하게 보여요. 사람을 구분할 때는 입고 있는 옷 색깔과 헤어 스타일로 판단하죠. 그래서 친구가 새 옷을 입고 오거나 머리를 자르면 못 알아보곤 해요.”

태어날 때부터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이 빛에 약한 탓에, 낮에 마음껏 시내를 활보하지도 못한다. 가장 답답한 건 공부를 할 때다. 눈앞에 책을 바짝 붙여도 한 문단을 읽는 데 한참 걸린다. 저시력으로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은 임미진(21·경북 경산시)씨는 “다른 친구들이 1시간이면 공부할 분량에 꼬박 하루가 걸리니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대학 진학이 불가능할 것 같아 많이 울었다”고 했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돋보기를 신청해서 사용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저시력은 물체가 기울어져 보이거나, 주먹만 한 크기의 구멍을 통해서만 시야가 확보되는 등 사람마다 그 증상이 매우 다양하다. 단순히 물체를 확대하는 돋보기로는 효과를 볼 수 없다. 휴대용 독서확대기 역시 정부로부터 비용의 80%를 보조받아 사용해봤지만, 휴대폰 크기만 한 화면에 글자가 3개 정도밖에 들어가지 않아 오히려 더 불편했다. 컴퓨터 화면의 내용을 음성으로 바꿔주는 보조기기도 기억에 한계가 있어 꾸준히 사용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탁상용 독서확대기는 책 한 권의 3분의 2가 다 들어가고, 글자 크기와 바탕 색깔까지 모두 조절할 수 있어서 저시력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기기이지만, 가격이 300만~400만원대로 비싸기 때문에 지원하는 정부나 기업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저시력 아동 지원 한참 늦은 우리나라

전국의 만 18세 이하 저시력 아동의 숫자는 11만2253명(2010년, 통계청). 학령기(만 6~12세) 시각장애 아동 중 75~80%가 저시력 아동으로 추정될 정도로 최근 그 수가 계속 늘고 있다. 예전에 대다수를 차지하던 점맹(작은 빛도 감지할 수 없는 시각장애)은 이제 전체 시각장애인 중 15%에 불과하다. 점맹의 위험이 있는 아동이라도 어릴 때 수술을 받아 저시력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시력인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시스템은 한참 뒤떨어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애인 보조기기 보급사업의 90%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정보화진흥원’에서 저시력인에게 지원한 독서확대기 수는 7년간 2310대로, 이는 국내 저시력인구 약 5만7000명을 생각할 때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이조차 시각장애인 1급, 기초생활수급자, 취업자에게 우선 배정되기 때문에 저시력 아동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매년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보급하는 탁상용 독서확대기 수는 평균 90대 정도다. 저시력 학생을 교육할 수 있는 전문 특수교사가 없는 것도 문제다. 특수교육학과에 가도 점맹을 위한 교육 방법이 대부분이고, 저시력의 증상에 따른 지도 방법을 터득할 길이 없다. 미영순 전국저시력인연합회 회장은 “일반학교·특수학급 교사를 대상으로 저시력 아동 교육 연수를 실시하려 했으나 신청하는 선생님이 없었다”며 “눈이 잘 안 보이면 코·귀·혀 등 다른 감각을 일깨우는 기능 강화 훈련이 필요한데,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한 다른 교육에만 신경을 쏟는 부모가 많다”고 지적했다.

선생님의 관심과 부모님의 교육으로 독서확대기를 지원받게 된 민우(가명·14세)군이 책을 보고 있는 모습. /정유진 더나은미래 기자
선생님의 관심과 부모님의 교육으로 독서확대기를 지원받게 된 민우(가명·14세)군이 책을 보고 있는 모습. /정유진 더나은미래 기자

◇맞춤형 교육으로 눈을 뜬 아이

김민우(14·경남 밀양시)군은 선생님의 관심과 부모님의 맞춤 교육을 통해 저시력을 극복하고 있다. 이상목(30) 밀양중학교 도움반(특수학급) 담임교사는 눈이 불편한 민우군을 위해 저시력 관련 전문 자료를 찾고, 독서확대기를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을 수소문했다. 시각장애 3급인 민우군은 오른쪽 눈으로는 물체의 형태만 확인이 가능하고, 왼쪽 눈의 교정시력은 0.1에 불과하다. 이씨는 “마침 하트하트재단에서 독서확대기를 지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총 10개 서류를 준비해갔다”며 “민우가 시각장애 1급도 아니고 차상위계층도 아니어서 해당이 안 될 줄 알았는데, 지원대상자로 뽑혔다는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전했다. 민우군 역시 “독서확대기를 받으면 지도가 그려진 사회책을 가장 먼저 읽고 싶다”면서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민우군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촉각을 강화하는 교육을 받아왔다. 민우군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자주 산에 올라가서 대나무를 잘라 대금·화살을 직접 만들곤 했다. 낚시도 가르쳤다. 민우군이 낚싯대를 들고 강가로 나가면 매번 양손에 1m짜리 가물치 두 마리를 잡아올 정도란다. 어머니 김영희(가명·41)씨는 당장 공부하기를 재촉하기보다는 다양한 체험 활동을 찾아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감각을 익힌 덕분일까. 눈은 잘 안 보이지만 민우군은 재료만 있으면 뭐든지 척척 만들어내는 ‘손재주 달인’으로 유명해졌다. 김씨는 “아직은 저시력 증상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부족한 것 같고, 민우처럼 지원이 필요한 아이도 굉장히 많다”며 “앞으로 저시력 아동을 위한 지원이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미국은 저시력 클리닉만 3000개 이상 운영하고 있으며(우리나라는 대학병원을 포함해 저시력 클리닉이 전국 10여곳에 불과), 일본·영국 등 다른 선진국 역시 1970년대부터 저시력 아동을 위해 도서관마다 독서 장애인 도서 코너를 운영하는 등 저시력 재활서비스가 보편화 돼 있다. 뉴욕 라이트하우스재단은 저시력 아동을 위한 교육은 물론, 양면의 색깔이 다른 도마 등 이들에게 필요한 맞춤형 일상용품을 제작·보급하고 있다. 임미라 하트하트재단 아동복지사업팀 팀장은 “보이지 않는 작은 차이가 아이들의 꿈을 바꾼다”면서 “지난 3년간 독서확대기를 260대 지원했는데, 앞으로 사각지대에 놓인 더 많은 저시력 아동에게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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