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지(가명·11)는 지난 2008년 ㅇㅇ원에 온 뒤부터 심술쟁이가 됐다. 시설의 언니들하고 다투고 동생을 때려 늘 사고뭉치로 불렸다. 생활지도 선생님이 제지를 하면 ‘욱’ 하여 방문을 쾅 닫기 일쑤. 어른들이 보지 않을 때는 밥 먹는 친구를 발로 차는 등 남을 괴롭히는 게 일상이었다. ‘죽고 싶다’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자주했다. 11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에, ㅇㅇ원 선생님들은 민지의 깊고 큰 상처를 무척이나 걱정했다.
#2
2016년 △△원에 입소한 재중이(가명·14)는 자신의 의사표현을 전혀 못하는 아이였다. △△원 상담 교수가 신규 입소 아동 상담을 진행하면서 “재중아 뭐 먹을까?” “땅콩아 혹시 원하는 것, 알고 싶은 것이 있니?” 등 일상적인 질문을 해도 재중이는 그저 “모르겠어요”만 반복했다. 심지어 재중이는 가장 가까운 가족인 엄마에게도 침묵을 지켰다. 재중이의 엄마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여동생과 함께 △△원에 아이를 맡기면서 교사에게 “처음엔 그냥 말수가 적은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감정 표현을 전혀 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면서 “△△원에 오는 게 결정된 뒤로 더 심해진 것 같다”고 걱정을 토로했다.
문제아 민지, 가장 말수가 적은 아이였던 재중이. 민지양과 재중군의 마음엔 언제쯤 따뜻한 봄이 올까.
지난 2016년 한 해 동안 국내 아동 4592명이 부모의 빈곤과 실직, 학대, 가출 등으로 아동복지시설, 위탁가정 등에 보내졌다(보건복지부, 2016년 요보호아동 발생 및 조치현황). 한국아동복지협회에 따르면, 불안정한 양육환경을 경험한 아동은 심리·정서적 불안감을 호소하거나, 내면의 문제가 행동으로 표출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실제 해당 아동의 34%(1540명)는 학대를 경험한 피해 아동이다.
전문가들은 “시설에 맡겨진 아동들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할 가능성이 큰 데다 성장기의 심리상태가 불안정하면 정서적, 신체적 발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심리 치유, 교육, 문화예술 등 다양한 활동으로 심리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시설 아동에 대한 심리 치료·재활 서비스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보건복지부는 2012년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아동복지협회가 보건복지부로부터 위탁받아 올해로 시행 7년차를 맞은 ‘시설 아동 치료·재활 지원’ 사업이다. 전국 아동복지시설 및 그룹홈(공동생활가정) 아동 중 심리·정서·인지·행동상 어려움을 겪는 아동들을 대상으로 심리검사, 치료 프로그램 및 가족 역량 강화 프로그램 지원 등 ‘맞춤형 치료·재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골자다. 아동 뿐 아니라, 실무 종사자를 위한 교육, 전국 시·도별 자원 네트워크 구축, ‘아동행복 찾기’ 매뉴얼 발간 등 종사자와 지역사회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민지양과 재중군도 지난해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분노감 조절에 어려움이 있었던 민지양에게는 상담치료는 물론 7회 모래놀이 치료와 48회의 합창활동, 태권도 배우기 등 다양한 정서적, 신체적 활동을 통해 억눌린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민지는 교우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홀로 하는 활동보다 합창, 태권도처럼 공동체 활동에 주로 참가했다. 민지양의 사례 담당자는 “민지는 부모와 사람에 대해 불신이 크면서도 이를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폭력 등 잘못된 행동을 보여왔는데, 상담 선생님과의 지속적인 대화, 친구들과의 다양한 창작 및 신체 활동으로 사람에 대한 신뢰가 회복된 것 같다”고 말했다. 민지양의 상담 선생님 또한 “민지는 주목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커 가끔 소통에 어려움이 생기지만, 대화를 하다보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섬세하면서도 고운 마음이 느껴져 정말 기쁘다”고 이야기했다.
재중군은 총 18회의 상담치료와 10회의 게임놀이 치료, 아동-가족 역량강화 프로그램, 월 1회 멘토-멘티 프로그램 등을 시작했다. 감정표현을 극히 조심스러워하는 재중군의 특성에 맞춰 ‘자신의 감정 이해하기’ ‘감정 표현의 방법’ 등, 아주 기초적인 단계부터 차근차근 진행했다. 재중군의 상담교사는 “원가정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다가 상담을 받으면서 감정을 잘 표출하게 되는 등 개별 상담을 받는 효과가 정말 좋았다”고 밝혔다.
또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재중군을 위해 상담교사와의 보드게임도 제공됐다. 처음에는 어색해했던 재중군이었지만, 게임을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늘어가면서 함께 게임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도 보이고, 자신이 잘 아는 게임은 교사에게 규칙을 정확하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재중군에겐 엄마와의 관계회복이 절실했다. 지난해 엄마가 함께 입소한 동생을 데려가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재중군을 두고 가면서 재중군은 무척이나 낙심했다. 이에 엄마와 함께 하는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엄마와의 대화 시간이나 대화의 수준이 많이 향상됐다. 재중군은 참여후기에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감정을 엄마에게 표현할 수 있었고,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어서 정말 좋았다”고 썼다.
수치도 효과를 뒷받침한다. 두 아동 모두 아동·청소년 행동평가척도(K-CBCL)상으로도 문제 행동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중군은 K-CBCL 점수가 무려 15점 줄었고(사전 70, 사후 55), 민지양 역시 7점 감소(사전 73, 사후 66)했다.
임상심리 측면에서는 문제행동 총점이 1점이라도 감소하면 치료효과가 큰 것으로 판단한다. 지난 2017년 사업에 참여한 585명 아동은 평균 12.9점만큼 문제행동이 줄었고, 특히 미취학 아동(139명)의 경우 18.47점이나 문제행동이 감소해 개입시기가 빠를수록 효과가 컸다. K-CBCL은 아동 및 청소년의 사회 적응 및 정서행동 문제를 평가하는 세계적인 척도다. 자아 존중감도 높아졌다. 자아존중감 척도(SES)로 지난해 참여 아동들의 전후를 비교한 결과, 미취학 아동이 평균 2.26점, 초등학생이 0.17점, 중·고등학생이 1.24점 상승해 평균 1.43점이 올랐다.
지난해까지 한국아동복지협회의 ‘시설 아동 치료·재활사업’을 통해 혜택을 받은 아동은 총 3448명. 6년간 총 54억원의 예산이 투입돼 매년 500명 이상의 시설 아동이 지원을 받았다. 2016년부터는 그룹홈에 대한 지원도 시작돼 약 60여명의 그룹홈 아동이 혜택을 받았다. 한국아동복지협회는 효과성 평가 및 사례관리 성과 연구로 연구보고서를 발간, 지속적으로 시설 내 아동들을 지원해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