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당신, 지금 행복하십니까?”
2013년 웹툰 ‘송곳’, 2014년 드라마 ‘미생’은 우리에게 이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후 ‘송곳’은 독자의 인기에 힘입어 드라마로도 제작됐지만, 노동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한 광고에서 최저시급을 알려줬던 아이돌 혜리는 ‘맑스돌’로 불리고, 최악의 실업난 속에서도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은 27.7%다(2016년 신입사원 채용실태 조사, 한국경영자총협회). 그렇다면 교육은 변했을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노동 교육에 할애되는 시간은 최대 5시간에 불과하다. 대학교육은 어떨까. 대학시절에는 아르바이트, 인턴, 계약직 등으로 ‘첫 노동’을 경험하는 비율이 높아 노동교육이 절실하다. 지난달 9일, ‘노동인권감수성Tok!Talk!’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경희대를 취재했다.
“변기에 5만원을 떨어뜨렸다면 어떨까요? ‘사생결단’하고 찾겠죠?”
오후 2시, ‘노동인권감수성Tok!Talk!’ 수업을 담당하는 김창수 교수가 간단한 사자성어 퍼즐로 수업을 시작했다. 강의자료가 띄워진 스크린에는 10원부터 5만원까지 돈을 잃어버렸을 때 나타날 만한 태도에 관한 사자성어가 답으로 제시됐다. 학생들은 사자성어를 맞히면서도 이게 수업내용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갸우뚱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만약 잃어버린 게 돈이 아니라 나의 인권과 건강이라면 사생결단하고 찾으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주제는 산업재해입니다.”
변기에 10원을 떨어뜨리면 태연자약(泰然自若)할 수 있지만, 5만원을 떨어뜨리면 어떻게든 돈을 찾으려 하는 게 인간의 본성. 그러나 건강과 인권은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임에도 돈보다 가벼이 여기곤 하는 세태를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김창수 교수는 “산업재해와 같이 일을 하다 건강을 잃거나 인권을 침해당하는 일이 생겼을 때 태연자약하거나 수수방관(袖手傍觀)하지 말아야한다”고 당부했다.
◇토의하고 공감하고··· 몸과 마음으로 키우는 노동인권 감수성
산업재해는 일을 하다가 다치거나 병에 걸리거나, 장애를 입는 경우를 말한다. 산업재해는 업무상 사고와 업무상 질병으로 나뉘는데, 산재보험 가입여부와 상관없이 1인 이상이 일하는 곳이라면 본인의 실수로 다치거나 일을 그만두었더라도 4일 이상의 요양을 받아야 한다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학생들은 산업재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곧바로 조를 지어 앉았다. 각 조에 나누어진 것은 산업재해 그림판. 그림판에는 식당, PC방, 미용실, 주유소, 병원 등이 모인 번화가가 그려져 있고, 각 장소에서 일을 하고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김창수 교수가 “산업재해로 보이는 상황에 동그라미를 쳐라”고 요구하자 조용하던 강의실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회사 야유회에서 부상자가 나온 그림을 본 한 학생이 “야유회에서 운동하다 다친 것도 산업재해라는 기사를 본 것 같다”고 말하자, 다른 학생이 “그냥 회사 사람들끼리 노는 것 아닐까요?”라고 반박했다. 또 다른 조에서는 버스 사고가 난 그림에 “버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누구 과실이라고만 하지 산업재해라고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총 7개로 나눠진 조에서 갑론을박이 오갔다. 학생들이 생각보다 쉽게 동그라미 표시를 하지 못하자 김창수 교수가 힌트를 줬다. “제가 갖고 있는 답은 31개입니다. 그림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수 있으니 법률적인 부분만 고려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보세요”라고 했다. 김창수 교수의 말이 끝나자 강의실 여기저기서 “답이 그렇게 많으냐”는 탄성이 나왔다.
15분쯤 지나자 31개를 모두 찾은 조가 손을 들어 발표했다.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헷갈려한 것은 애매한 상황이었다. 특히 그림 왼편의 한 가정집에서 베이비시터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습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이에 대해 김창수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가사노동자가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한다. 관련 법안들이 제출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답했다.
산업재해 상황 찾기 후에는 안전도우미 선물하기가 이어졌다. 산업재해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안전장치나 장비의 이름을 쓰거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학생들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발휘됐다. “PC방에서 생수통을 갈다가 허리를 다치지 않으려면 정수기를 직수로 바꿔야 한다”, “야유회에서 다치지 않으려면 스포츠맨십이 필요하다” 등의 발언이 나오자 강의실은 까르르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산재사고로 사망하는 비율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비율보다 높습니다.” 김창수 교수는 강의를 마무리하며 산업재해의 위험성에 대해 강조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산재사망률이 OECD 국가 중 1위다. 하지만 개선이 쉽지만은 않다. 김창수 교수는 “우리가 방금 그린 안전도우미들이 기업에서는 모두 비용이기 때문에, 인권 문제지만 기업에서는 이게 비용으로 전환된다”며 “이를 개선하려면 사회적 인식이 바뀌고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 안 가르치는 대학들··· 서울시내 7곳뿐
경희대는 지난 2012년부터 ‘노동인권감수성Tok!Talk!’ 수업을 개설해왔다. 이 수업은 학생들의 요구로 열리기 시작해 6년째 지속하고 있다. 경희대는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학생들의 수업권을 보장하기 위해 ‘배움학점제’를 운영하고 있는데, 배움학점제 강좌들은 대학생위원회가 수요조사를 통해 학생들이 듣고 싶은 과목과 강사를 학교에 추천하면 심사 후 강좌가 개설된다. ‘노동인권감수성Tok!Talk!’ 역시 배움학점제 과목 중 하나다.
안기환 경희대 커뮤니케이션센터 담당자는 “노동인권감수성Tok!Talk!은 원래 40명 정원 한 과목으로 개설되다가 이번 학기에 처음 분반이 됐는데 80명 정원이 모두 찼을 만큼 학생들의 호응이 좋다”고 했다. 실제 학생들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경영학과 정지윤(23) 학생은 “노동이라고 하니 좌익 같은 이념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 수업에서는 그런 구분 없이 노동자의 생활을 알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경제학과 류승규(25) 학생은 “정보경제학이나 노동경제학을 배우면서 효율성만을 계산했었다. 그러다보니 실질적인 생활임금 문제 등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수업을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대학생들이 학교수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노동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서울시내 4년제 종합대학 27곳을 조사한 결과, 법학과 전공 수업 외에 교양 수업에서 노동법이나 노동인권을 교육하는 곳은 건국대, 경희대, 덕성여대, 명지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중앙대 등 7곳이었다. 우리나라 일반고등학교에서 노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은 고1 사회 1.8시간, 법과 사회 1시간, 사회문화 1시간 분량인데 이마저 학생들의 선택과목에 따라 교육시간은 달라진다. 그런데 대학의 노동교육 역시 학교마다 천차만별로 학생들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해 학생들은 일침을 가했다. 경희대 경제학과 류승규 학생은 “교육 제반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보다 일반화돼서 노동자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희대 경영학과 정지윤 학생은 “언론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느냐에 따라 사회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언론에서도 노동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고 했다. ‘미생’과 ‘송곳’이 회자되지 않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홍보라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8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