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회 홈리스월드컵, 오슬로 현장을 가다
“다음 경기는 캄보차(캄보디아), 그리고 사우스 코리아!”
주심의 호각 소리와 함께 풋살 잔디 구장으로 선수들이 들어섰다. 평균 나이 42.3세. 1960년생부터 2000년생까지 40년 세월을 뛰어넘는 한국 대표 선수단 8명이 경기장에 섰다. 나란히 선 캄보디아 선수단은 양볼에 여드름 자국이 선연한 ‘최연소 팀’이다. 곧이어 노르웨이 시청 앞 광장엔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첫 경기 결과는 7대5로 한국의 패. 첫 골문을 연 건 박진순(42) 선수다.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하고도 3개월간 꾸준히 훈련에 참가하다, 알코올 문제로 탈락한 다른 선수 대타로 선발된 그다. “노르웨이 까지 날아와서 애국가를 들으니 울컥했어요. 골 넣으니 날아갈 것 같죠(웃음).” 승리에 목숨 걸지 않고, 져도 마냥 아쉽지만은 않은 경기. 장장 18여시간을 날아 도착한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제15회 ‘홈리스 월드컵(Homeless Worldcup)’ 현장을 찾았다.
◇전 세계 홈리스 ‘축제의 장’
8월 29일부터 지난 5일까지 열린 홈리스 월드컵은 전 세계 노숙인을 비롯한 주거 취약 계층(홈리스·homeless)이 한데 모여 치르는 월드컵이다. 2003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첫 대회를 시작으로 호주·브라질·멕시코 등 매년 다른 곳에서 개최됐다. 올해로 15회째인 이번 월드컵에 참여한 선수는 54개국 72개팀, 총 500여명. 한국이 홈리스 월드컵에 참가하는 건 올해로 8번째. ‘홈리스’로서는 평생 단 한 번만 참가할 수 있다는 규칙에 따라 매년 새로운 대표팀을 꾸려 참가해 왔다. 8년 만에 처음으로 올해는 현대자동차그룹에서 국가대표팀을 후원하기도 했다.
“해외에선 ‘홈리스’를 훨씬 넓은 개념으로 봐요. 어린 시절 적절한 교육의 기회가 부족했거나 안정적인 주거 시설이 없는 이들도 ‘홈리스’ 범주에 들어가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노숙인만을 지칭하다 보니 막연하게 ‘불쌍하다’거나 ‘게으르다’는 편견이 큰 것 같아요.”(이화선 빅이슈코리아 스포츠팀 매니저)
‘축구를 통해 사회적 단절을 겪고 있는 주거 취약 계층의 자립 의지를 키우자.’
홈리스월드컵재단에서 10여년째 월드컵을 이어 온 취지다. 저마다 각기 다른 사연을 품고 변두리로 밀려났던 이들이 이곳에선 주인공이 됐다. 국적 불문하고 춤과 인사를 건네는 분위기 메이커 김영도(38)씨는 최고 ‘인기남’이었다. 한국팀이 경기를 할 때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표단이 찾아와 ‘영도 킴’과 한국 선수단을 응원했을 정도. “다들 사회 풍파 지나온 사람들이잖아요. 말은 안 통해도 웃고 춤추고 하면 다 통해요. 내가 언제 태극 마크 달고 외국까지 나와서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겠어요. 한평생 못 잊을 추억이에요.”
◇축구, 삶을 바꾸다
변화의 스토리를 안고 홈리스 월드컵을 다시 찾은 이들도 많았다. 노숙인을 위한 지역 기반 축구 조직 ‘스트리스 사커 스코틀랜드(Street Soccer Scotland)’를 창립한 데이비드 듀크(David Duke) 대표도 그중 하나. 10년 가까이 월드컵을 찾는 그는 2004년 제2회 대회 선수 출신이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나 역시 알코올에 중독돼 길 위를 방황했다”던 그는 “홈리스 월드컵을 통해 삶의 방향을 틀었다”고 했다.
그해 스코틀랜드는 최종 4위까지 올랐다. 귀국 후 지역 소년 축구팀에서 코치로 뛰기 시작한 그는 사회복지를 공부했고, 빅이슈재단에 취직했다. 2009년엔 직접 사회적 기업 ‘스트리스 사커 스코틀랜드’를 설립했다. 올해로 8년, 이 기업은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30여개의 축구 자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제가 여기까지 온 게 저도 가끔은 신기해요(웃음). 그 힘을 다시 돌려주고 싶은 거죠.”
‘스트리스 사커 USA’ 프로그램 총괄 매니저 올리버 웨이스(Oliver Weiss)는 “홈리스 축구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8가지 삶의 기술’을 쌓도록 한다”고 했다. “일단 제시간에 나와야 해요. 규칙적으로 살고, 약속에 책임을 져야 하죠. 축구를 할 땐 집중해서 전력을 다해 움직여야 해요. 가끔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공격도 감행해야 하고, 실패도 맛보면서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도 느끼죠. 스스로의 분노나 감정도 잘 다스려야 하고 전술과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팀 스포츠’라 협력하고 소통해야 하죠. 축구가 가진 변화의 힘입니다.”
취약계층의 자립 의지 부추기는 ‘홈리스 월드컵’
한국, 올해 8번째 새로운 대표팀 꾸려 참가해
‘팀 스포츠’인 축구… 협력·소통으로 변화 이끌어
◇길 위에서 리그로, 다시 삶으로
지난 5일, 축제는 끝났다. 한국 대표팀의 성적은 2승10패. 경기는 마쳤지만, 이제는 다시 삶이다. 알코올 중독 자활 시설인 비전트레이닝센터에서 머물며 사회적기업 아름다운가게 용답 되살림터에서 근무하는 김태수(49) 선수는 “더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서른 살에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다 10년이 지났고, 일어서려던 그를 몇 번이나 주저앉힌 건 술이었다. 한 달 반 동안 술만 마시다 쓰러진 적도 있었다는 그가 월드컵에 참여한 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조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큰아빠가 되고 싶기 때문’. “일주일에 세 번씩 훈련하면서 몸을 움직여 운동할 때의 기쁨과 행복감을 알게 됐다”는 그는 새로운 후반전에 임할 준비가 됐다. “인생 전반전은 시간을 너무 허비했거든요. 백세 인생이고, 축구는 후반전이잖아요. 인생 후반전은 최선을 다해서 뛸 겁니다.”
최연소 주장, 월드컵 전체 23골을 기록한 채희태(17)군에겐 축구 선수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이다. 채군은 “처음에는 나이도 어린데 주장을 시켜서 너무 힘들었는데, 막상 경기에 들어가니 승부욕이 생겨 소리도 크게 지르고 완전 달라졌다”며 “예전엔 상대팀이 얼마나 잘하는지 궁금하고 긴장됐는데, 몇 번 해보니까 그것도 내 안에서 온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채군은 내년 4월을 목표로 검정고시 준비도 시작했다.
원인 모를 우울증으로 “자살 기도를 다섯 번이나 했다”는 ‘거미손’ 정순만(44) 골키퍼. “지난 2년간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키면 얻은 게 더 많다”는 그는 교회에서 차량 봉사를 하고, 국가장학금을 받으며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 중이다. “이젠 돈을 좇지 말고 삶을 바꾸기로 했어요. 감사하고, 좋아요.”
조현성 감독은 “선수들 마음에 생겨난 작은 불씨를 꺼지지 않게 잘 이어가는 게 앞으로의 과제”라고 했다. “홈리스를 ‘사회적인 자살’이라고 불러요. 스스로 관계를 지탱할 에너지가 고갈돼 모든 관계를 끊어낸 상태거든요. 월드컵의 뜨거웠던 기억이 ‘한순간의 물거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이어지도록 서로가 지지대가 되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