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 사각지대, 이주노동자 자녀 보육·교육 현장 취재
필리핀에서 온 이주노동자 알렌(가명·36)씨는 얼마 전 가족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내가 일을 그만두게 됐기 때문. 알렌씨가 혼자 버는 최저임금만으로는 양육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한국에 혼자 남기로 결정했다. 아빠와의 갑작스런 이별의 충격 때문일까. 큰 아이 샐리(가명·8)는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다.
60만명.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의 숫자다. 경제적 이유로 한국 땅을 밟은 이들은 제조업 공장, 농장, 고기잡이 등 일손이 부족한 곳을 찾아 일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외국인 아동 숫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2012)에 따르면, 이주노동자의 71.73%가 “한국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답했다. 하지만 국적법상 이주노동자의 자녀들은 한국에서 태어나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어렵다. 부모가 불법체류자일 경우 신분 노출을 염려해 출생등록을 꺼리는 데다가, 한국에 살기 때문에 모국에 출생등록을 하는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
국적이 없는 아이들은 한국에서 교육을 받기 어렵다. 비자가 없어 어린이집에서 거절당하는 경우가 35.4%에 달한다(국가인권위원회 2012). 국적이 인정돼 다닐 수 있더라도 민간 어린이집의 보육료는 부담이다. 실제로 경제적 이유로 어린이집에 자녀를 보내지 못한다고 답한 이주노동자들이 41.2%에 달한다(경기도 외국인 근로자 가족 인권상황 실태조사, 2013). 이에 시민단체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이들을 위해 보육시설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들 모두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 이주노동자 자녀를 위해 설립된 어린이집 현장을 찾아가봤다.
◇이주노동자 자녀 보육 문제, 복지 사각지대
경기도 남양주의 마석가구공단. 이곳엔 약 800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1995년 설립된 ‘샬롬의 집 무지개교실’은 이곳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자녀들을 돌보는 보육시설이다. 오전 8시10분부터 오후 5시10분까지, 이주노동자들의 업무시간에 맞춰 보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비용은 월 15만원. 일반 사립 어린이집 비용이 40만원인 것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2015년 이주노동희망센터에서 발간한 미등록이주아동 실태 연구에 따르면 시민단체에서 운영하는 보육시설은 월 15-20만원으로 일반 사립 어린이집 비용이 40만원인 것에 비해 저렴하게 운영되고 있다. 샬롬의 집은 경기도에서 위탁을 받아 이주노동자를 위한 법률상담지원, 의료지원사업, 지역아동센터와 결식아동 도시락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경기도 지원 사업 중 이주노동자 자녀 보육 사업(무지개교실)은 제외돼있다. 미등록 아동이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미등록 아동은 서류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동들이기에 어린이집 인가도 어렵다. 반면, 이주노동자가 많이 거주하는 경기도와 서울의 경우, 보육조례를 통해 일반 사립 어린이집에 다니는 이주노동자 자녀를 일부 지원해주고 있다. 이정호 샬롬의 집 관장은 “정부나 지자체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민간 기업과 시민단체 그리고 후원자들의 기부 덕분에 아이들이 보육 혜택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9년간 샬롬의 집 무지개교실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현대차의 후원 덕분에 이주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미술심리활동영어교육·동화구연·체육 등 오감발달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하지만 올해 여름, 후원 계약이 만료된다. 무지개교실 담당자인 김설이 사회복지사(29)는 “당장 후원자를 찾아야하는 상황”이라며 “아이들 간식비, 프로그램 운영비 등 필요한 비용은 많은데 정부 지원조차 받을 수 없으니 막막하다”고 설명했다.
◇다문화 어린이집’, 아동 수에 비례한 지원 시급해
‘다문화 통합 어린이집’ 역시 상황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경기도는 2006년부터 외국인 아동이 3명 이상 다니는 다문화 통합 어린이집에는 교사 1명의 인건비(140만원)를, 외국인 아동만 다니는 ‘다문화 전담 어린이집’에는 최대 3명의 교사 인건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렇게 경기도가 지원하는 다문화 어린이집 숫자는 총 74개소다. 하지만 현장에선 “교사 인건비 지원 보다는 아동 수에 비례한 지원이 시급하다”며 “더 많은 아이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정책 보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차은진 안산해아어린이집(52) 원장은 “아동이 3명이든, 35명이든 지원금이 140만원으로 동일해 아동이 많은 다문화 어린이집일수록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지원금이 적다”고 지적했다. 국가별 언어와 문화 차이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교사 교육 역시 시급하다. 차 원장은 “아이들이 한국에 적응하려면 이들을 돕는 교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며 “교사를 위한 문화 이해 교육뿐 아니라 아동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에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 등 선진국, 소득 기준 따라 무상으로 유아교육 지원해
해외는 어떨까. 미국에선 체류 자격에 상관 없이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아동에게 유아 교육을 제공하는 ‘헤드 스타트(Head Start)’ 정책이 있다. 이주노동자 부모를 따라 미국에 오거나,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부모가 일하는 동안 방치되지 않고 안전하게 교육 받을 수 있도록 ‘이민자 헤드 스타트’ 교육 프로그램(Migrant and Seasonal Head Start)을 운영하고 있는 것.
이민자 헤드 스타트 프로그램은 연방정부에서 80%, 주 정부에서 20%를 부담한다. 연방정부의 소득기준에 미달되는 가정의 아동은 무료로 유아교육을 받을 수 있다. 미등록 아동인 경우도 마찬가지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미등록 아동의 교육 지원을 대법원 판례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 이를 통해 3만2000명이 넘는 아동들이 보건, 교육, 영양, 복지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다. 멕시코에서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온 렌겔(20)씨 역시 해당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헤드스타트 프로그램 덕분에 부모님이 안심하고 농장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릴 수 있었고, 나 역시 헤드스타트 덕분에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이번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OECD와 유럽위원회는 가난한 이주노동자 자녀들이 충분한 유아교육을 받고 자랐을 때, 학업성취도도 높고 사회에 더 잘 적응한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회원국가들에 관련 지원을 제안한 바 있다. 김경동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이주노동자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집 교육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서 “국내에도 이주노동자 가정의 자녀들을 위한 실질적인 관심과 효과적인 교육 시스템 정착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수지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7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