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일)

‘영수증 스캔 20분, 1년에 1만장’… 개발협력사업 발목 잡는 보조금

개발협력 민간 경상보조금 문제

“동티모르 현지인 가게에선 자동차 타이어를 80달러면 교체한다. 그런데 올해 바뀐 지침 때문에 간이 영수증이 사업비로 인정 안 돼, 결국 수도까지 나와서 외국인 가게로 갔다. 180달러를 주고 타이어를 교체했다. 현지 직원들이 ‘왜 우리나라 도우러 와서 외국인 배불리는 데 사업비 낭비하냐’고 묻는데, 할 말이 없었다.”

국제구호개발NGO ‘더프라미스’의 옥세영 동티모르 지부장의 말이다. 더프라미스는 동티모르 시골 마을에서 식수 개발 사업을 진행 중이다. 옥 지부장은 “개도국 오지(奧地)에서 개발협력 사업을 하는데, 보조금 기준에 맞추다보면 사업을 제대로 하기 힘든 구조”라고 했다. 동티모르에서 공정무역 커피 생산자를 지원하는 한국YMCA전국연합은 지난해 아예 코이카 사업에 불참했다. 양동화 한국YMCA전국연합 팀장은 “행정 절차의 불편함을 넘어 이렇게는 사업을 못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보조금 방식대로라면 산골짜기 현지인에게 사업비를 집행할 때도 계좌이체를 해야 하는데, 동티모르엔 수도에 있는 외국계 은행 하나가 전부다. 계좌를 개설하려면 매달 3달러를 내야 한다. 일당이 4달러인 현지인 입장에서 돈 찾으려면 수도까지 가야 하는데 말이 안 된다.”

◇보조금 틀, 개발협력사업에 안 맞아

국제개발협력 민간 NGO들이 한목소리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유는 뭘까. 지난해 기획재정부가 코이카의 국제개발협력 민관협력사업 예산을 외교부 ‘민간경상보조금’으로 변경하면서 생긴 일이다. 민간단체의 보조금 부정수급을 막겠다는 게 이유였다. 올해 1월부터는 온라인 기반 국고 보조금 관리 통합 체계인 ‘e나라도움’ 시스템까지 도입했다. ▲체크카드 사용 등으로 사용 내역을 실시간 관리하고 ▲주민등록번호·사업자등록번호 등을 입력해 부정 수급을 막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보조금 방식 실행 후 1년 반, 현장에서는 “국제개발협력 사업에 적용하기는 무리”라는 반응이다.

신재은 KCOC 정책센터 팀장은 “민관협력사업은 정부가 개발협력 사업을 하는 민간단체와 파트너십을 맺고 개도국 사업을 지원하려는 취지로 1995년 시작된 사업”이라며 “20년이나 된 사업인데 시민사회의 의견 청취나 유예 기간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통보했다”고 했다.

문제는 전산화가 잘 갖춰진 한국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제도이다 보니, 정전이 잦고 인터넷 환경이 불안정한 개발도상국에선 적용이 어렵다는 것. 레바논에서 시리아 난민 지원 사업을 하는 밀알복지재단 홍인경 과장은 “사업 하나당 연간 최소 1만건 이상 영수증이 발생하는데, 해외 사무소에서는 영수증 하나를 스캔하는 데만도 20분 넘게 걸린다”며 “결국 영수증을 박스에 모아 한국에 우편으로 부치면 직원들이 일일이 스캔하고 한글로 사용처를 번역해 입력해야 하는데, 이전에 비해 행정 처리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늘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우간다 월드비전에서 질병퇴치기금사업을 수행하며 3개월간(4/4분기)나온 사업영수증을 모아놓은 것 ⓒ월드비전

기계적인 규정 탓에 행정력 낭비도 크다. 홍 과장은 “지원하는 시리아 난민들의 개인 정보를 모두 ‘e나라도움’에 입력해야 하는데, 대다수가 신분증이 없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신분 등록 제도가 있는 나라는 드물고, 특히 개도국일수록 신분 등록 제도 자체가 없다. 홍 과장은 “입력이 어려운 경우엔 ‘0’으로 일괄 입력하라는 지침을 받았는데 모든 사람을 ‘0’으로 입력하다 보니 정작 부정수급 방지라는 취지와는 다르게 행정 비용만 낭비하는 셈”이라고 했다.

◇’감시를 위한 감시’ 넘어 ‘원조효과성’ 큰 틀에서 책무성 제고해야

신용평가회사 애널리스트 출신이자, 가나 현지 사업 총괄인 김형모 월드비전 과장은 “정부와 산하기관, 비영리단체 사이에 신뢰가 없어, 비용 낭비와 비효율이 너무 심한 상황”이라며 “영수증 한 건씩 보고해야 하는 나라는 우리와 일본밖에 없다”고 했다. 국제기구, 해외 유명 재단, 국제 NGO의 경우 사업 수행 기관을 고르는 스크리닝 단계에서 심사를 엄격하게 하고, 이후 무작위로 표본을 추출해 감사를 진행하는 방식을 택한다. 실효성 없는 일괄 규제가 아니라 문제가 생긴 곳에 패널티를 강하게 주는 방식이다 보니 업계 전반의 투명성·책무성 수준이 함께 올라간다는 것이다.

김성진 굿네이버스 국제개발본부 혁신사업팀장은 “세계식량기구(WFP) 같은 UN기구나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개발협력 사업을 진행할 경우, 현지에서 공인된 회계사를 통해 사업을 회계·감사 받고, 공증 문서를 받아 제출하는 방식으로 불필요한 행정 비용은 줄이고 투명성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기획재정부 예산실 관계자는 “민관 협력 예산이 지난 6년간 2배 이상 커졌고 투명성 강화 차원에서 ‘보조금’으로 전환한 것”이라며 “구체적인 현장 사례를 좀 더 파악한 후 외교부 및 코이카와 추가 협의하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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