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최신원’으로 익명 기부할 때가 더 나았지. 얼굴을 드러내고 하니까 부담이 돼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미 내 머리에는 봉사와 기부가 임팩트 있게 콕 박혀버렸는걸.”
최신원(65) SK네트웍스 회장은 이달 초 한국 기부사(史)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세계공동모금회(이하 UWW)가 처음 설립한 초고액 기부 클럽인 ‘1000만달러 라운드 테이블’ 회원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최 회장이 한국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한 금액은 37억원이 넘는다. 앞으로 10년 동안 70억여 원을 추가 기부하기로 약정했다. 회삿돈을 활용한 기부금이 아니다. 오롯이 개인 돈이다. 이 멤버는 현재 전 세계에서 32명뿐이다. 마이클 헤이드 UWW 전(前) 리더십위원장 부부(3조 규모의 미 부동산 개발 회사 ‘웨스턴 내셔널그룹’ CEO), 존 렉라이터 UWW 이사회장(글로벌 제약사 일라이릴리 회장),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 부부가 설립한 재단) 등이다. 이런 과감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이 행복하잖아. 우리 인간이 살아생전에 좋은 일을 얼마나 하고 간다고 생각해요? 전 세계 고액 기부자들과 만나면서 많이 보고 배웠어요. 남을 생각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있더군요. 이번에 제가 상을 받았는데, 일본인과 중국인 등 여기저기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난리였어요. 제가 배웠듯,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보고 배우지 않을까요?”
◇한국 ‘아너 소사이어티’, 중국과 멕시코로 확산
최 회장은 지난 9~12일 미국 올랜도에서 열린 유나이티드웨이 커뮤니티 리더스 콘퍼런스에서 ‘글로벌 필란트로피 어워드’를 받았다. “Shinwon Choi”라는 이름이 불리자, 뚜벅뚜벅 단상에 오른 그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수상 소감을 밝혔다.
32명의 1000만달러 라운드테이블 멤버 가운데, 최신원 회장만 유일하게 ‘글로벌 필란트로피 어워드’를 받았다. 개인 나눔활동의 불모지인 아시아 지역에서의 활동과 멕시코와 중국에까지 한국의 아너 소사이어티 모델을 전파하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서였다. “가족들은 1000만달러 기부를 반대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최신원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대하면 안되지”라고 했다. 그는 앞으로 국내 문제뿐 아니라 글로벌 이슈에도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
“올랜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곰곰이 지난날을 되돌아봤습니다. 저는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기는 가풍 속에서 자랐습니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기부해왔는데, 어느 날 모금회에서 저를 찾아와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앞장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아너 소사이어티(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 창립 멤버로 참여했습니다. 이것은 한국 최초의 고액 기부 프로그램으로, 미국 토크빌 소사이어티를 모델로 만들어졌습니다. 2007년 6명으로 시작한 회원 수가 어느덧 2000명을 향하고, 누적 기부액도 1억6000만달러(1800억원)에 이릅니다. 뿌듯하기도 하고, 또 한편 어떻게 가능했을까 놀랍기도 합니다.”
전(前)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로빈슨(메리로빈슨재단 기후정의 이사장), 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 창업자, 마리베스 비지니어 월트디즈니 총괄부대표 등 유명인사와 기업 리더, 고액 기부자 등 참석자 2000여 명은 “어메이징(Amazing)”이라는 감탄사와 함께 기립박수를 보냈다. 최 회장은 “짧은 기간 성장한 아너 소사이어티 모델을 해외에서도 무척 놀라워한다”며 “최근에는 중국 상하이에서도 이 모델을 배우러 왔다 갔다”고 설명했다. 이뿐 아니다. 지난해 멕시코에서 최 회장을 ‘번영의 소사이어티(Orden de la Prosperidad)’ 명예대사로 위촉, 한국의 아너 모델 확산을 이식하기 시작했다.
◇2015년엔 전 세계 고액 기부자 서울에 초청하기도
“모르겠어. 그냥 어려운 걸 보면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에 강릉 산불 현장에도 기부하려고 마음먹고 있어요.”
최신원 회장은 나눔과 기부와 관계된 일이라면 어김없이 이름이 등장한다. 기아대책 고액 기부자 모임인 ‘필란트로피 클럽’ 26번째 멤버이고, ‘선경최종건재단’ 이사장으로서 매년 고등학생 100여 명에게 장학금을 준다. 한국해비타트의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클럽 ‘더 프리미어 골든해머’ 회원이기도 하다. 군 간부 자녀들을 위해 설립된 파주 한민고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에 2억원을 기부했고,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이시형(18) 선수가 경기 남양주 다세대 주택에서 어렵게 생활하며 운동 중단 위기를 맞자 공식 후원을 결정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으로 직접 고액 기부자 회원을 끌어오는 펀드레이저(fundraiser) 역할을 하고, 지난해에는 나눔교육포럼 초대회장으로 나섰다.
이쯤 되면 기업 회장인지, 비영리단체 리더인지 헷갈릴 법도 하다. 최 회장의 미국행에 동행한 한 관계자는 “해외에서는 기부자들에게 대한 존중과 예우가 뜨거운 반면, 한국에서는 ‘회삿돈 아니냐’ ‘국내에도 어려운 이들 많다’는 등 냉소와 비판이 나오는 걸 보고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선진국에선 기업 오너가 비영리단체 이사진으로 나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는 사례가 무척 흔하다. 최 회장은 2015년 UWW 산하 고액 기부자 모임인 ‘세계리더십위원회’ 멤버 50여 명을 서울로 초청해 서울 라운드 테이블을 열 당시의 이야기를 꺼냈다. 최 회장과 마이클 헤이드 위원장이 함께 10만달러씩 기부하면서 ‘유럽 난민기금’이 조성된 뒷얘기였다.
“헤이드 위원장이 ‘유럽 난민 문제가 심각한데, 최 회장이 나서서 10만달러를 기부해줄 수 있겠느냐. 당신이 하면 나도 같이 하겠다’고 권유했어요. 저를 배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모금을 요청하더라고요. 그 덕분에 시리아 내전 등으로 고통받는 난민 지원이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계기를 만들 수 있어 특히 보람됐어요.”
마이클 헤이드 전 UWW 리더십위원회 위원장은 시상식 현장에서 최신원 회장을 가리켜 “‘우리는 받아서 삶을 꾸려나가고, 주면서 인생을 꾸며나간다’는 윈스턴 처칠의 명언에 걸맞은 모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기부와 나눔은 새끼줄처럼 연결되는 것
“앞으로 어떻게 기금을 내고, 어디에 쓸 계획이냐”는 질문에, 최 회장은 “10년에 걸쳐 조금씩 나눠서 낼 생각”이라며 “탈북자와 다문화가족 등 소외된 이웃을 위해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경기모금회에서 제 기부금 중 일부를 ‘Choi’s happy fund’로 구성해, 이주 여성들을 고향에 보내줘요. 지난번에는 칠레 출신 여성이 10여 년 만에 고향에 다녀왔다면서 ‘너무 감사하다’며 털모자를 몇 개 사왔어요. 그걸 받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이런 게 제가 할 일이죠.”
최 회장은 오는 9월 루마니아에서 열리는 행사에선 자신의 기부가 만들어낸 임팩트와 변화를 참여자들과 나눌 계획이라고 했다.
“아직 한국을 잘 모르는 국가가 많아요. 전쟁을 겪어 살기 힘든 나라라는 인식도 있고요. 저는 우리가 얼마나 시민의식이 높고, 선진국과 어깨를 견줄 만한 훌륭한 나라인지 알리고 싶었어요. 한국의 아너 소사이어티, 매달 조금씩 기부하는 경비 아저씨 등 우리의 기부 스토리를 들려주면 사람들이 감동해요.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비즈니스를 할 때도 이런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그는 기부야말로 ‘보고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최 회장의 아버지인 고(故) 최종건 선경그룹(현 SK그룹) 창업주는 대학병원에서 정기적인 검진을 받았음에도 뒤늦게 폐암 진단을 받고 손쓸 겨를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 부친은 진단을 늦게 한 의사를 원망하는 대신, 정확한 진찰을 할 장비가 없음을 알고 돌아가시기 전 그 대학병원에 진단장비를 기증했다고 한다. “나처럼 진단이 늦어 아까운 생명을 잃는 사람이 없도록 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아버지의 나눔은 최 회장에게 왔고, 최 회장은 또 그 나눔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한다. “고액 후원자들을 어떻게 모으느냐”고 물었는데, 최 회장은 제주시 노형동의 유명한 생근고기 전문점 ‘돈사돈’ 양정기(58) 대표 이야기를 했다. 목욕탕 청소부, 구두닦이 등 가난한 어린 시절을 딛고 차린 고깃집이 10년 만에 연 매출 수십억원 대박집이 된 것이다. 10년 넘게 그 집 단골이었던 최 회장에게 양 대표가 어느 날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회장님, 앞으로 좋은 곳에 돈을 좀 쓰고 싶어요”라고. 그렇게 양 대표는 제주의 35번째 아너 회원이 됐고, 아내 또한 아너 회원이 됐다고 한다.
“새끼를 어떻게 꼬는 줄 알아요? 서로 연결고리가 돼서 새끼줄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기부와 모금도 똑같아요. 아는 사람이 옆에서 나누는 걸 보면,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연결돼요. 아는 사람을 자꾸 가입하게 만드는 거죠.”
최신원 회장은 인터뷰 내내 “행운이다” “행복하다”는 말을 반복했는데, 어쩌면 이건 그의 선택이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자라고 다 이런 선택을 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