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현지 적응편
지난 10월,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한 줄 한 줄 메일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이력서를 보니, 우리 팀에 적합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첨부된 직무 기술서(Job Description)를 확인하시고, 관심이 있다면 인터뷰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세요.”
꿈에 그리던 유네스코가 아닌가! 감격스런 마음과 함께 의문이 들었다. 내가 유네스코에 직접 이력서를 제출한 적이 없었던 것. 무슨 연유인지 수소문 끝에 무릎을 탁 쳤다. 환경부가 주최하는 국제 환경 전문가 양성 과정(8기)을 수료하면서 근무하고 싶은 국제기구를 제출한 적이 있었다. 교육 과정을 주관한 환경공단에서 이력서를 유네스코 본부로 보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류 전형이 진행됐던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다음주 수요일 저녁, 가능합니다!”
◇영상통화로 면접을? 유네스코 합격까지
“민정씨 목소리가 안들리네요.”
한국 시간으로 저녁 8시, 이탈리아 시간으로 오후 12시. 정장을 입고 떨리는 마음으로 노트북으로 스카이프(SKYPE)에 로그인하자 전화가 걸려왔다. 외국인 두 명이 화면 속에서 웃으며 손을 흔든다(지금은 내 슈퍼바이저가 된 필립(Philippe)과 유네스코 유럽사무소의 또 다른 프로그램의 스페셜리스트인 프란체스카(Francesca)였다). 하지만 이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듯 귀를 가리키며 고개를 젓는다. 전화를 두 번이나 다시 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 기회를 날려버릴 순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에 스카이프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이제 들려요!” 가슴을 쓸어내렸다. 천만다행이었다.
“민정씨, 준비 됐나요?”
“잠시만요, 잘 들을 수 있도록 이어폰을 가져올게요.”
영상통화로 면접을 본다고 해도 긴장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유네스코의 교육 분야가 주 관심사였는데, 모르는 질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휴대폰을 들고 있자니 팔이 아팠지만 열심히 웃는 얼굴로 질문에 대답했다.
“유네스코의 ‘인간과 생물다양성 프로그램'(Man and Biosphere Reserve Programme)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떤 지식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기관의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자의 생각과 가치관을 물었다. 지원동기, 장단점, 기여할 점 등 예상과는 다른 질문에 당황했다. 그동안의 내 경험과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답변을 하면서도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생물 다양성 프로그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어요. 나와 다른 방식에 대한 생각과 답변이 인상적이었어요.”
면접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면접관들은 내게 친절하게 코멘트를 해줬다. 대화에 가까운 면접이 무르익을수록 유네스코가 지향하는 목표와 비전을 느낄 수 있었다. 일방적으로 나를 어필하는 면접이 아니라, 서로가 같은 목표를 향해 뛸 수 있는 사람인 지 알아가는 시간임을 깨달았다. 면접을 마치고, 곧바로 이메일을 보냈다. “인터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네스코가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그 일을 꼭 함께 하고 싶습니다. 더 궁금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이메일을 보내고 3주 뒤, 합격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평화로운 세상이 될까?’
평화학(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국제평화학과 졸업)을 전공하면서 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진 질문이다. 나이, 성별, 국적, 인종 등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교육을 통한 평화’에 그 해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유네스코는 교육, 문화, 과학, 문화 등 다양한 국제협력 활동을 통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UN 기구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연합국 교육 장관들이 영국 런던에 모여 전쟁으로 황폐해진 교육을 재건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고, 1945년 11월 16일 37개국 대표들이 영국 런던에 모여 ‘유네스코 헌장’을 발표하면서 교육을 통한 평화에 기여하는 국제기구 ‘유네스코’가 창설됐다.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비롯되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울 곳은 인간의 마음속이다(Since wars begin in the minds of men, it is in the minds of men that the defences of peace must be constructed).”
유네스코(UNESCO)의 헌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국제기구 취업을 위해 여러 곳을 알아보던 중, 유네스코 헌장을 읽는 순간 생각했다. ‘바로 이곳이다’라고. 모두를 위한 교육(Education For All), 더불어 사는 학습(Learning to Live Together), 포용적이고 동등한 양질의 교육(Inclusive, equity, and quality education for all) 등을 통해 평화에 기여하는 유네스코, 이곳에서 평화를 만드는 길에 함께하고 싶었다. 그렇게 유네스코 유럽지역사무소(UNESCO Regional Bureau for Science and Culture in Europe, Venice)에 파견된 견습 직원(인턴)으로 첫 걸음을 내딛게 됐다.
◇출근 직전 현지 적응기, 인턴을 위한 숙소는 없다?
2017년 1월 24일 밤 11시 30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최종 합격의 기쁨도 잠시, 출근 전까지 숙소 마련부터 모든 행정 절차는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환경관리공단의 국제 환경 전문가 양성 과정을 통해 국제기구에 파견되는 인턴은 왕복 항공료와 6개월의 생활비를 지원받는다. 근무 기간 동안의 생활비는 출국 전 한꺼번에 지급받는데, 숙소를 비롯한 모든 비용을 스스로 해결해야한다. 내게 닥친 가장 큰 숙제는 주거 문제였다. 유네스코 차원에서 인턴을 위해 마련해둔 숙소가 따로 없었던 것.
기대와 설렘으로 비행 내내 뜬 눈으로 보낸 터라,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22kg에 달하는 캐리어를 낑낑 대며 숙소 입구에 도착했는데, 맙소사. 호텔 문이 잠겨있었다. 분명 새벽에 도착한다고 이메일을 보내고 호텔에서도 24시간 안내데스크를 운영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호텔 문을 쾅쾅 두드리자, 호텔 직원이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허공에 직사각형을 그리며 말했다. “서류를 보여주세요(Your document please).” 도통 어떤 서류를 이야기하는지 몰라 “없다”고 했더니, “서류가 없으면 이곳에 머물 수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했다. 심장이 덜컹했다. 휴대폰으로 캡쳐한 예약 내역을 보여줬지만 소용이 없었다. 울음이 터지려하는 나를 귀찮은 듯 쳐다보던 직원은 “이번 한 번 뿐”이라며 열쇠를 내밀었다.
이튿날 새벽, 6개월 머물 숙소를 구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됐다. 2월 1일 출근까지 D-7일. 일주일간 이사를 마치고 출근 준비까지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베네치아 페이스북 그룹 페이지와 이탈리아 부동산 웹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모르니 일일이 사전을 검색하며 찾아갔다. ‘2 Camera, 4 Piano.’ 집을 검색했는데 왜 카메라와 피아노 4대가 나올까? 사전을 다시 찾아보니 이탈리아어로 camera는 방, piano는 층이란 뜻이란다. 즉 4층 집, 방 2개란 뜻. 이 때문에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들은 번역이 되는 페이스북을 선호한다. 빈 방 사진과 글이 올라오면 30분 만에 댓글이 15개 이상 달릴 정도다. 댓글을 늦게 달면 이미 계약이 끝났다고 봐야하니, 외출도 못하고 하염없이 노트북 화면만 바라봐야했다.
부동산을 여러번 찾아가봤지만, 한결같이 ‘NO’라는 소리만 들었다. 부동산은 주로 장기 임대 계약이나 매매 매물만 취급한다고 했다. 집주인들은 단기 임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계약서를 작성할 때 세금을 내야하는데, 단기 세입자를 위해 계약서를 새로 쓰고 세금을 내는 일이 번거롭기 때문이다. 최소 1년 임대가 아니면 물량은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루에 세 군데씩 집을 보러 다녔다. 햇빛은 잘 드는지, 따뜻한 물이 나오는지, 치안은 어떠한지 등 확인해야할 사항을 꼼꼼하게 메모한 뒤 집주인과 협상을 해나갔다. 2월은 세계적인 베네치아 축제 카니발(Carnevale di Venezia)이 열리는 시기라, 관광객을 위한 숙소도 꽉 차있는 상황. 결국 첫 근무일까지도 집을 구하지 못했다. 당장 출근을 해야하는데, 일주일에 100유로 이상을 숙박비로 쓸 순 없었다. 다행히 같이 일하는 인턴 동료 준페이(Junfei)가 집을 구할 때까지 방을 같이 쓰자고 했다.
매일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오는 빈 방을 확인하고, 점심시간과 퇴근 후 집을 보러다녔다. 그러던 중 “우리 집에 싱글룸을 쓰는 친구가 많이 아파서 계약만 했는데, 다음 달부터 방을 빼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가격, 방 크기, 채광 등 모든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계약서, 보증금 등 협상을 한 끝에 3월 첫째주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유네스코 유럽지역사무소에선 걸어서 50분 거리. 관광객이 많은 퇴근 시간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베네치아 섬 서쪽 끝에 위치한 우리 집은 동료들이 ‘세상 끝에 있는 집(The house at the end of the world)’이라 부른다.
◇비자 따로, 체류 허가증 따로
이탈리아에 사는 외국인들에게 또 하나의 난관은 ‘체류허가증’이다. 체류 허가증 신청서를 작성할 때 두통약을 먹어야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 이탈리아에선 90일 이상 장기 체류를 하는 경우, 비자 종류와 관계없이 무조건 체류 허가를 받아야한다. 이는 입국 날짜 기준으로 반드시 8일 내에 이뤄져야한다. 체류 허가증은 전부 이탈리아어로 돼있고, 영어로 번역된 서류가 없다. 직원들과 영어로 의사소통도 안되고, 종종 서류가 떨어져 허탕치기 일쑤다. “서류를 언제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면 직원들은 “나도 모른다”며 나중에 오라고 한단다. 서류를 프린트할 수도 없다. 키트(Kit Giallo)라고 불리는 서류봉투 안에 토익 시험지처럼 얇은 책자가 있는데, 봉투 안에 있는 작성 방법을 보며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적어야 해서 반드시 키트를 통째로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키트를 받기 위해 우체국을 찾았다. “체류 허가증을 달라”고 영어로 말하자, 우체국 직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탈리아어로 ‘체류 허가증(Permesso di Soggiorno)’이라고 글자를 적어 노트를 내밀자, 서류 봉투를 건네준다. 키트를 들고 세무서를 찾았다. 체류 허가증과 함께 신청해야하는 세무번호(Codice Fiscale)를 받고, 서류를 작성하기까지 먼저 도착한 인턴 동료들, 유네스코 유럽지역사무소 직원, 로마에 있는 지인 등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하고 찾아가며 번역을 부탁했다. 빠뜨리거나 틀린 내용이 없는지 몇 번씩 확인하고 신청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체류 허가증을 신청하려면 130유로를 내야하는데, 60유로만 지불한 것. 한인 유학생 커뮤니티 등을 급하게 수소문해보니 나중에 경찰청에 가서 차액을 더 내면 된단다. 체류 허가를 받으려면 경찰청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면접을 보고, 열 손가락 지문을 등록해야한다. 이렇게 지문을 등록하고 최종적으로 체류허가증을 받기까지 약 1~2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리곤 불시에 경찰이 집을 찾아와 실제 살고 있는지 여부를 검문한다고 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이탈리아의 복잡하고 이상한 행정 절차에 혀를 내둘렀다.
1월 마지막 주, 체류허가증을 신청하고 3월 중순이 돼서야 경찰청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 시간은 9시 반.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렸다.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모르는 나를 위해 건물 시설을 총괄하는 클라우디오(Claudio)가 동행해주기로 했다. 체류허가증 신청 영수증, 여권, 여권 사진, 비자, 세무번호, 보험증명서, 트레이너십 계약서 등 필요한 서류를 꼼꼼하게 챙겼다. 경찰청에 들어가 서류를 제출하자 경찰관이 도장을 찍어줬다. 2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10분 만에 모든 업무가 끝났다. 추가로 돈을 낼 필요도 없었다. 지문을 스캔하기 위해 옆 방으로 들어갔다. 손가락 하나 하나를 기계에 대고 눌렀다. 이제 경찰청에서 체류허가증 수령일을 문자로 보내준다고 했다. 최대 2~3개월 걸린다는 체류허가증, 나는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
(2부에선 유네스코 유럽지역사무소 출근 첫 날 장면을 시작으로 인턴 24시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본죠르노(Buon giorno)! 지속 가능 발전 교육(Educa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에 끌려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날아온 유네스코 유럽지역사무소에서 인턴으로 근무 중인 연습생(Trainee) 김민정입니다. 유네스코 유럽지역사무소는 유럽 남동부 및 지중해 지역 국가의 평화와 지속가능발전을 촉진하는 기구입니다. 이곳에서 저는 현재 과학 정책, 환경, 지속가능발전 분야의 사업 및 프로그램 운영을 돕고 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과 사람에게 한없이 끌리는 것이 고민이자 삶의 활력소입니다. 평화학을 전공하며 배운 지식과 비전을 유네스코에서 어떻게 녹여낼 지 생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