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에코 없는 ‘에코보틀’, 이대로 괜찮을까?

직장인 박지연(26)씨는 요즘 부엌 찬장만 보면 근심이 가득하다. 하나 둘씩 늘어난 에코보틀이 어느새 찬장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박씨는 “처음엔 환경보호란 취지에 공감해 에코보틀을 선호하게 됐지만, 막상 집에 쓰지 않는 보틀만 늘어가 처치곤란”이라면서 “멀쩡한 제품을 버리자니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 같아 이도 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윤리적 소비의 대표주자로 꼽혔던 에코보틀이 집안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에코보틀이 홍보마케팅을 위한 판촉물로 사용되면서 본래 취지가 퇴색되고 있는 것. 에코보틀의 핵심은 하나를 구매해 계속 사용하는 것인데, 국내에서는 ‘재사용’은 커녕 ‘재구매’를 부추기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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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러형부터 투명한 에코보틀까지 다양한 보틀로 가득찬 장희수(25세)씨의 찬장. 장희수씨는 최근 영국유학유학박람회에 방문했다 에코보틀 판촉물을 공짜로 수령했다. ⓒ장희수

◇홍보 판촉물로 전락해버린 에코보틀 

에코보틀(eco-bottle)은 플라스틱 물병으로, 무게가 70~80g로 가볍고 재사용이 가능하다. 일회용 컵 사용을 줄일 수 있어, 저탄소·친환경을 지향하는 소비자에게 주목받았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디자인도 특징이다. 내용물로 개성을 표현할 수도 있어 젊은 층에서는 패션아이템으로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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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보틀은 내부가 투명하게 보이는 디자인으로 홍보 판촉물로 인기다. ⓒ한승아

현재 가장 활발하게 에코보틀 마케팅을 펼치는 업종은 뷰티 및 식음료업계다. 제품 구매 시 보틀을 무료 증정하거나, 저가로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CJ올리브영은 4월 지구의 달을 맞아 일정금액(3만5000원) 이상 구매하면, 친환경 에코보틀(350ml)과 에코파우치 등을 포함한 ‘그린 액션 키트’를 증정했다. 커피빈도 지난 3월 음료 구매 시 보틀을 1000원에 판매하는 행사를 진행했고, 투썸플레이스는 올초 콜드브루커피 구매 시 보틀을 무료 증정했다. 이밖에도 마이쥬스 등 주문 시 매번 보틀을 무료 증정하는 신규브랜드도 생겨났다.

올리브영, 4월 '지구의 달' 맞아 에코파우치·워터보틀 키트 증정_1
CJ올리브영은 지난 4월 지구의 달을 맞아 일정금액 이상 구매하면, 친환경 에코보틀(350ml)과 에코파우치 등을 포함한 ‘그린 액션 키트’를 증정했다. ⓒ올리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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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스를 구매하면 에코보틀을 공짜로 주는 매장 안내판. ⓒ한승아

대학가에도 홍보용 에코보틀 열풍은 거세다. 입시설명회나 교내 캠페인을 위한 홍보물로 에코보틀을 제작하는 학교가 늘고있다. 동아리 홍보를 위해 보틀을 무료로 배부하기도 한다. 기업 행사와 박람회 등에서도 에코보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올해 3월 서울시가 주최한 ‘제1회 결혼이민자 취업박람회’와 지난 2월 ‘롯데월드타워 취업박람회’에서도 홍보용 보틀이 무료로 증정됐다. 

◇1000원 미만의 저렴한 제작 단가, 오히려 쓰레기만 양산하는데…

에코보틀이 홍보 판촉물로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코보틀은 브랜드 로고나 원하는 문구를 새겨도 제작 단가가 1000원 미만으로 저렴한 편이고, 남녀노소 모두 활용할 수 있어 인기가 높다. A 판촉물 업체 관계자는 “4년째 보틀이 판매 1위 제품”이라고 귀띔했다.  E 판촉물 업체 관계자도 “판촉물은 크기가 클수록 받는 사람이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보틀은 크기가 크면서도 제작 단가가 수건이나 타월보다는 저렴하고, 물티슈, 접착메모지 등의 판촉물과 달리 사람들이 잘 버리지 않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홍보하는 입장에서도 보틀은 매력적인 판촉물이다. 서울 모 대학 재학생 정수정(가명·20)씨는 “지난해 단과대 학생회 차원에서 에코보틀을 제작해 무료로 증정했는데 학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면서 “환경보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저렴한 제작 단가가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쯤되면 과연 에코보틀이 윤리적 소비를 촉진하는지 의문점이 생긴다. 취업준비생 이수빈(25)씨는 “음료를 구매하면 보틀이 공짜로 생기니 환경도 보호하고 경제적이라 생각해 자주 이용했다”면서 “하지만 열 번 이용하면 열 개의 보틀이 생기는 셈이라 오히려 낭비가 되더라”고 말했다. 대학원생 안정하(26)씨 집에도 벌써 에코보틀이 4개가 있다. 안씨는 “가격이 저렴해서인지 품질이 나빠 얼마 못쓰고 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면서 “이게 진짜 윤리적 소비가 맞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업계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서울에 위치한 모 음료 매장 직원은 “처음에는 일회용컵 사용을 줄이고 재방문을 유도할 목적으로 보틀을 무료로 증정했지만 참여하는 사람은 소수”라면서 “하루에 최소 30개 이상의 보틀이 나가는데 솔직히 환경보호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실생활과 맞닿아있는 윤리적 제품 개발 필요해 

해결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단기적 유행에서 벗어나 지속성있는 윤리 소비를 유도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국 시장은 규모가 작고 경쟁이 치열한 편이라, 윤리 소비마저도 유사 상품을 쏟아내기 쉽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업이 만들어내는 제품 안에 윤리적 관점에서의 디자인을 결합시키는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대표적인 예는 글로벌 식품 회사 네슬레의 ‘쇼트 캡(short chap)’이다. 쇼트 캡은 일반 페트병의 병뚜껑보다 높이가 낮아, 0.7g 가량 가볍다. 네슬레 측은 “병의 플라스틱 무게를 줄여 탄소배출량을 감소시켰다”고 설명한다. 병뚜껑의 밀폐·보관 기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여 환경보호에 도움을 준다는 말이다. 장영균 서강대 지속가능기업 윤리연구소 부소장은 “실생활과 맞닿아 있는 쇼트 캡과 같은 상품들이 더 많은 소비자를 윤리적 소비에 참여시킬 수 있다”면서 “기업이 비(非)시장 영역에 진입할 때는 기존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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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슬레 퓨어라이프 생수는 기존 생수제품의 뚜껑과 비교해 0.7g 정도 가벼운 쇼트 캡을 사용한다. 이를 통해 업계 평균대비 42% 상당의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이는 연간 약 64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는 것과 동일한 효과다. ⓒ네슬레 퓨어라이프 자료

이어 장 부소장은 “한국에 진정한 윤리 소비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제도, 소비자의 삼각 공조가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 “기업은 자신이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어떠한 측면에서 윤리적 소비 효과를 내는지 직접 소비자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슬레가 쇼트캡을 만들어낸 것도 하나의 예시가 되겠죠. 제도적으로는 유럽연합(EU) 의회가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정보 공개를 의무화한 것처럼, 제조물 판매규정 등 관련 법령에 의한 윤리소비 정보 공시도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기업 스스로 참여할 수 있게끔 다양한 정책적 인센티브도 중요하죠. 무엇보다도 소비자도 가성비만을 따지는 소비 풍토에서 벗어나 인류공동체적으로 한 발 앞서 고민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한승아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7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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