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야구 스타, 거절 당하며 첫 사회 경험
“야구로 정상에 있을 때보다 나누며 사는 지금이 더 행복해”
지난해 7월, 이만수는 야구 활성화 공로를 인정받아 라오스 총리가 수여하는 훈장을 받았다. 그는 이제 라오스에 야구장을 세울 계획을 갖고 있다. 지난해엔 라오스 올림픽조직위원장과 교육체육부 장관을 만났다. 그 결과, 와따이 국제공항 남쪽에서 20㎞ 떨어진 부지 2만평을 50년 동안 빌리는 것을 승낙 받았다. 그는 한국의 ODA(국제개발협력) 자금을 통해 라오스 야구장 건립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 부처도 쫓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결실을 맺기까지 그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만 했다. 좋은 일을 ‘잘’하는 것 또한 전문성과 노하우가 필요했기 때문. 사회공헌과 나눔에 있어서 ‘뉴 페이스’인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야구 스타의 옷을 벗어 던지고 “신입사원의 자세로 직접 뛰어다녔다”고 했다.
◇거절당하고 도전하며 깨닫게 된 것들
-한국에 돌아와서 후원자를 만나러 다녔다고 하던데.
“네. 과거 야구 유니폼을 입고 있었을 때 친절했던 사람들이 싸늘하게 돌아서더군요. 50명을 만나면, 50명 모두가 제 부탁을 거절했어요. 대놓고 사기꾼 취급을 하더군요. 세상이 냉정한 곳이라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 같아요.
‘왕년의 야구 스타’ 이만수도 별 수 없나보다 싶었죠 (웃음). 후원받아오겠다고 큰소리쳤던 라오스 아이들의 얼굴이 아른아른 거렸습니다.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열심히 발로 뛰었죠. 5개월이 지나자 주변 사람들이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제가 아이들 돕는 일을 일회성으로 할 줄 알았거나 언론 플레이하는 정도로 생각했던 겁니다. 끝까지 포기 안 하고 도움을 요청하니 그제야 진심을 알아주더군요.”
그는 “팬클럽, 스포츠용품 기업들, 사업가 등이 이제 야구용품과 기부금을 보내준다”며 “어제도 독일 출장 다녀오니 큰 상자 3개가 도착했는데, 지인이 야구용품을 보내온 것”이라고 했다.
-라오 J 브라더스의 든든한 후원군 역할을 자처하셨다고요.
“처음 라오스에 갔을 땐 감독이었지만 이제는 구단주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후원자들을 찾아 다니며 후방에서 구단을 지원하죠. 47년 야구계에 있으면서 쌓은 명성과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게 저의 몫인 것 같아요. 지난해부터 권영진 전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이 라오J브라더스 단원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또 박종철 감독이 지난해 7월 3년 계약을 맺고 라오스로 갔습니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은 그만둔 건가요.
“아뇨. 야구 강습은 계속하고 있어요. 1년에 4번 정도 라오스에 들어가서 20일 동안 아이들을 직접 지도해요. 하지만 야구만 가르치지는 않아요. 아이들의 정서 발달과 자존감 회복을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있어요. 제일 효과가 좋았던 건 단원들을 한국으로 초대한 거였어요. 2015년 8월 20여 명의 단원들이 한국으로 와 서울, 인천, 부산 등지를 여행했는데요. 단원들이 목적 의식을 갖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또 한국 여행 이후 아이들이 부쩍 밝아졌고요.”
-한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인천, 부산에서 한국의 프로 야구 경기를 보여줬어요. 또 인천 문학 경기장에 가서 야구 수업도 받았습니다. 제대로 된 야구 경기장에서 실력있는 코치진에게 강습을 받으니 야구가 더 재미있고 계속 하고 싶어졌나 봐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제 지인들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무척 행복해 했어요. 여행이 끝난 뒤 단원들에게 ‘한국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에 대해 묻자, 대부분 ‘한국 아저씨 아줌마들과 함께 지낸 일이 가장 좋았다’고 했어요. 단원 중 대다수가 가족이 없거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화목한 가정에 대한 갈망과 부모의 애정을 그리워해요. 그동안 받은 상처를 한국에서 따뜻한 ‘정’으로 위로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해에도 한국 여행을 이어가고 싶어요. 후원금을 열심히 모아 반드시 실행에 옮길 겁니다.”
◇ “질레트 선교사처럼 라오스에 교육 주춧돌 놔주고 싶어”
-현역으로 있을 때보다 은퇴한 지금이 더 바쁜 것 같네요.
“감독 자리에 있을 땐 그래도 1년 중 절반 정도는 집에 들어갔는데 요새는 1년의 3분의 2를 해외 또는 지방에 있어요. 바쁜 만큼 몸이 많이 고되죠.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피로가 많이 누적돼 있어 혈압이 높아졌다고 하더라고요. 건강 생각하면 나눔 활동을 쉬엄쉬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질 않네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재능기부까지 하다 보면, 너무 힘들지 않나요.
“지난해 새로 산 차는 벌써 9만㎞ 이상을 달렸어요. 작년에 아내에게 ‘감독 끝나고 1년 반 동안 월급도 못 주고 재능기부 다니는데, 괜찮냐’고 물었더니 ‘감독할 때보다 지금 1.5배 더 쓴다’고 하더라고요. 아내에게 가장 미안하죠. 동시에 감사하고요. 제 활동을 적극 지지해주거든요. 47년 동안 야구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돌려줄 때가 됐다면서요. 쌀이 똑 떨어지면 얘기할 테니, 그때까진 하고 싶은 대로 하래요(웃음).”
-무슨 동력이 있습니까.
“제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 때문이죠. 거꾸로 저를 도와주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야구 강습을 갔던 한 시골 중학교 학생 아버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어요. 제게 수업을 받고 온 아들이 ‘나중에 야구 선수가 되든 안 되든 이만수 감독님처럼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대요. 그 편지를 읽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수도권과 달리 시골 도서 산간 지역의 아이들은 야구를 전문적으로 배울 기회가 적어요. 스포츠 및 교육 인프라도 열악하고요. 제가 쌓은 야구 경험을 이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그는 “개인적으로 제 자랑하고 싶은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40년 넘도록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야구 일지를 매일 썼던 것”이라며 “은퇴 후 야구 해설·재능 기부·야구 아카데미 설립·책 쓰기 등 22가지를 할 생각이었는데, 이 중 20가지를 다 이뤘다”고 말했다.
-못 이룬 것 두 가지는 뭔가요.
“나머지는 좀 시간이 걸리는 것들이라(웃음). 라오스에 야구장과 연습장, 수영장 등이 있는 복합 시설과 학교를 만들려고 해요. 1904년에 질레트 선교사가 조선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다 교육 인프라를 만들어 줬던 것처럼 저도 라오스에 주춧돌을 놔주고 싶어요. 이 목표를 이루는 데 20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올해부터는 국내 야구 꿈나무들을 위해 야구 강습뿐 아니라 금전적 지원도 할 예정입니다. 오는 10월 말쯤 재능 기부를 다녔던 학교 학생들과 추천 받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수 포수와 투수 한 명씩 선정해 각각 금일봉과 야구용품을 주려고 해요. 4월에는 라오스에 돌아가 라오스 야구 실업팀을 만들어보려 합니다. 야구가 밥벌이로 이어지지 않아요. 야구 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야구와 관련된 직업을 주고 싶어요. 라오스 현지 기업가들을 만나 실업팀 설립 제안을 해 볼 생각입니다.”
인터뷰 막바지, 그가 털어놓은 마지막 말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한 분야 최정상에 섰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간다고 생각합니까? 1년? 2년? 10년? 아니에요. 일주일을 못 갑니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기 때문이죠. 최정상에 섰을 때 매일 불안해하며 살았는데, 지금 제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감사합니다’예요. 재능 기부, 나눔 활동을 하면서 달라졌습니다. 제 걸 다 나눠주고 들어오는 건 없어도 행복합니다. 애들이 저한테 안기면서 ‘감독님’ ‘할아버지’ 하면 마음이 사르르 녹습니다. 나누면 행복하다는 사람들 말을 요즘 이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