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3일(토)

휠체어는 우리의 날개…국내 최초 휠체어 소프트볼팀 ‘비전(VISION)’

국내 최초 장애인 소프트볼팀 ‘비전(VISION)’ 

 

한국 국가대표로 일본 국제 교류전 참가

20대부터 60대까지 실력파 선수들로 꾸려져 

휠체어 소프트볼로 장애인 스포츠 수준 높여

 

배트는 묵직했다. 공은 눈 깜짝할 새 스트라이크 존으로 떨어졌다. 몇 차례 휘두른 배트가 허공을 가르자, 감독은 번트 사인을 냈다. ‘깡’. 우연히 타이밍이 맞았는지 공이 투수 앞으로 튕겨나갔다. 휠체어 바퀴를 열심히 움직였지만, 공은 이미 1루수 미트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이고, 왜 안뛰어갔어요. 1루는 금방인데.”

땀을 뻘뻘 흘리며 그라운드에서 내려오는 기자를 보며 선수들이 껄걸 웃었다. “수비나 타격보다도 휠체어를 잘 다뤄야 출루할 수 있어요. 그래도 오늘 휠체어를 처음 타본 것 치곤 잘하시는데요(웃음).” 좌익수 이현준(35)씨가 기자를 위로했다. 실망도 잠시. 유격수 송이호(47)씨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띄웠다. “자자, 다시 집중합시다!” 

제1회 국내 휠체어 소프트볼대회에서 경기 전 파이팅을 외치는 비전팀 ©EnactusSogang
제1회 국내 휠체어 소프트볼대회에서 경기 전 파이팅을 외치는 비전팀 ©EnactusSogang

◇국내 최초 휠체어 소프트볼팀···우리는 VISION! 

 

휠체어를 타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소프트볼팀이 있다. 국내 최초로 휠체어 소프트볼 대회를 개최하고, 지난 7월엔 한국 국가대표로 일본 국제 교류전도 다녀왔다. 한국 최초의 휠체어장애인 소프트볼팀, ‘비전(VISION)’의 이야기다. 비전팀의 연습경기 현장. 기자는 이날 난생 처음 휠체어를 끌고 그라운드 위에서 배트를 휘둘렀다.

“작년에 휠체어 야구대회를 열었는데,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조금 덜 위험하면서도 진입장벽이 낮은 운동이 뭐가 있을까 찾다가 휠체어 소프트볼을 알게 됐어요. 미국과 일본은 이미 20~40년은 앞서 있어 각 지역별로 팀도 여러 개고 리그도 정착돼있죠.”

비전팀을 이끄는 최지원(서강대 경영 12학번)씨의 설명이다. 비전팀은 서강대 사회공헌 동아리 ‘인액터스(ENACTUS)’의 시도로 시작됐다. 국내 휠체어 사용자들을 위한 휠체어소프트볼 종목의 정착을 목표로, 2016년 2월 창단했다. 뜻에 공감한 14명이 팀을 꾸렸다. 모두 휠체어를 탄 이들로, 연령은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최씨는 “모두 소프트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넘치는 선수들”이라며 야구가 투수와 타자간의 싸움이라면, 소프트볼은 수비 위주로 경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좀 더 안전하고 신사적인 스포츠”라고 덧붙였다.

국제교류전에서 비전팀과 일본지역팀이 경기 전 인사를 나누고 있다 ©EnactusSogang
국제교류전에서 비전팀과 일본지역팀이 경기 전 인사를 나누고 있다 ©EnactusSogang

◇ 찰떡궁합 자랑하는 비전팀의 연습현장

 

비전팀은 매월 두 번, 토요일마다 광진구에 위치한 장애인 복지시설인 정립회관에 모인다. 서울시장애인체육회 소속 한완길(54) 감독이 팀을 지휘한다. 연습이 시작되자 선수들은 휠체어 러닝 5바퀴로 몸을 풀었다. 그 외 체조, 캐치볼, 수비-타격훈련, 간이 게임 등 훈련 모습은 보통의 야구팀과 비슷했다. 수비연습을 위해 선수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모여 있을 땐 넓어보이던 체육관이 순식간에 격렬한 휠체어 소리로 가득 찼다. 감독은 뜬공, 직선타, 땅볼 등 쉴 새 없이 공을 쳤고 선수들은 공을 잡아서 1루수에게 정확하게 송구하는 훈련을 계속했다. 투수 최성찬(44)씨는 “소프트볼용 공이 야구공에 비해 말랑하며 탄성력이 높다”면서 “언더핸드로 타자가 치기 좋게 던지는 제구력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유난히 눈에 띠는 선수가 있었으니, 비전팀의 주장 오성훈(36)씨였다. 벌어진 어깨, 정확한 송구, 팔 힘과 휠체어 컨트롤 실력까지. 그가 휠체어를 탄 지는 올해로 4년째. 이씨는 “워낙 예전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그런지, 휠체어 스포츠에도 빠르게 적응한 것 같다”며 웃음을 보인다. “장애인 스포츠는 선수가 별로 없어요. 보통 병원에 출입하는 휠체어 영업사원들의 권유로 시작하는게 일반적이죠. 저 역시 재활치료가 끝나자마자 입문했어요. 휠체어 농구를 2년, 럭비를 1년 했죠.”

주장 오성훈씨가 캐치볼을 하고 있다. ©박창현 작가
주장 오성훈씨가 캐치볼을 하고 있다. ©박창현 작가

수비에 있어서 ‘찰떡궁합’으로 불리는 선수들도 있다. 경추장애를 가진 이현준씨는 손을 비롯한 상체 움직임이 힘들다. 이 때문에 굴러오는 공을 허리를 숙여서 잡아내지 못한다. 대신 외야로 날아오는 공을 휠체어로 블로킹해 유격수에게 송구하면 송이호씨가 타자를 잡아낸다. 선수들은 “이들만큼 빛나는 2루수(외야수)-유격수 콤비를 본 적이 없다”며 두 사람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유격수 송이호씨가 송구하고 있다. ©박창현 작가
유격수 송이호씨가 송구하고 있다. ©박창현 작가

◇ 희망과 감동이 절망을 지운다

외야수 고아람(32)씨는 ‘장애인 운동 전도사’로 불린다. 특히 일본에서 치른 국제 교류전은 그의  편견을 깨는 계기가 됐다.

“일본 지역팀과 한창 경기 중일 때, 양쪽 팔이 없는 여자아이가 타석에 들어섰어요. 아무것도 못하는 친구를 왜 굳이 선수로 기용했을까 싶었죠. 그 아이는 조그마한 팔을 몇 번 움직이는 것 밖에 못했어요. 그런데 관람객들이 함께 웃고 박수를 치며, 즐겁게 소녀를 응원했어요. 솔직히 그 정도 장애면 운동은 커녕 일상생활도 힘들 거에요. 우리나라였다면 부끄럽고 불편하다며 집 안에 있었겠죠. 그런 친구가 선수로 나온 것도 감동적인데, 경기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보였어요. 동정의 시선이 아니었어요. 외야에서 수비를 보고 있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고씨는 “장애인이 눈치 보지 않고 집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만든 일본 시민들의 인식이 부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오랜 시간 장애인이 된 자신을 받아들이기까지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태권도를 준비하던 체육 특기생이었기에 좌절감과 상실감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은 후천적 장애인의 비율이 높다. 선천적 장애인과 후천적 장애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신의 장애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에 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던 그의 마음을 바꾼 건 배드민턴라켓이었다. “장애인에게 운동은 단순히 사교나 비싼 취미가 아니에요. 장애인이 스스로 장애를 인정하고, 극복하고, 긍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는 과정에 필수적으로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시도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장애인들이 너무 많아요. 일단 용기를 내보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 장비 및 정책적 지원 시급해

한완길 감독이 수비 연습을 하는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다. ©박창현 작가
한완길 감독이 수비 연습을 하는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다. ©박창현 작가

“일반 휠체어와 선수용 휠체어는 달라요. 선수용 바퀴는 안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어서 넘어지지 않게 도와줍니다. 개인적으로 구비하기엔 비싼 편이죠.”

비전팀의 매니저 최지원씨의 말이다. 최근 비전팀에 합류한 2기 최세영(58)씨는 최씨가 구해온 경기용 휠체어에 올랐다. “생각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아 어색하다”며 쭈뼛대던 그는 금세 훈련에 녹아들어 체육관을 누볐다.  

주장 이성훈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고 했다.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서다.

“장애인 스포츠를 하려면 경기용 휠체어는 물론, 비장애인 도우미가 필수적으로 있어야만 합니다. 장비 문제를 비롯해 지원이 늘어나야합니다. 휠체어 농구나 럭비처럼 소프트볼에 포인트제를 도입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장애 정도에 따라 포인트를 주고 다양한 장애를 가진 분들이 합류하도록 해 타팀과의 전력을 맞추는 겁니다. 진입장벽을 낮추고 재미를 더해야 우리나라의 장애인 스포츠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정식단체로 인정받는 것 역시 비전팀의 과제다. 한완길 감독은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 스포츠가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이들을 위한 지원과 홍보 채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아직은 어두운 장애인 스포츠의 길. 그래도 비전팀은 매일같이 배트와 공을 들고 휠체어에 오른다. 자신들의 모습을 통해 용기를 얻고 세상 밖에서 활약할 제2, 제3의 비전팀을 위해서다. 내년 시즌을 준비하는 비전팀은 2017년 1월까지 2기를 모집한다.

윤지원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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