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아픈 역사의 산 증인인 ‘고려인’의 국내 정착 돕는 시민단체 ‘너머’

지난달 15일 저녁 9시, 다세대주택이 빽빽하게 이어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의 한 골목길에선 어귀부터 한국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한민국에 체류 중인 고려인을 지원하는 국내 유일의 시민단체 ‘너머’에서 한국어 수업이 한창이었던 것. ‘너머’에선 5년 째 고려인들에게 무료로 한국어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날 수업을 이끈 강교식(53) 강사가 받아쓰기 문제로 ‘없다’를 내자, ‘업ㅎ다’, ‘업다’, ‘엇다’ 등 학생들의 다양한 오답들이 쏟아졌다. 정답을 공개하자 학생들은 “아~”라는 긴 탄식으로 오답의 아쉬움을 표현했다. ‘너머’의 김영숙(49) 사무국장은 “고려인들에게 한국어는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다들 고려인의 정체성과도 연결돼 있다는 생각에 모국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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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지원 시민단체 ‘너머’의 한국어 수업 현장./너머 제공

야학이 시작된 건 2012년, 연해주로 재이주하는 고려인의 정착을 지원하던 사회적기업 일원들이 힘을 모으면서였다. 김 사무국장은 “안산에 거주하는 고려인이 한국어를 몰라 생활에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작은 봉사에서 시작하게 됐다”며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는 고려인의 사정상 야학으로 수업을 진행하게 됐다”고 설명헀다.  

처음 10명이던 학생은 입소문이 나면서 6개월 만에 2배로 늘어 새로운 수업 장소를 물색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야학을 찾아오는 고려인들이 많아지자 생활상담도 늘어났다. 김 사무국장은 “고려인이 한국어가 서툴다보니 임금체불부터 병원, 행정문제로 상담하는 경우가 많아 ‘보다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겠다’ 생각 들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를 위해 고려인의 언어장벽부터 국내의 고려인에 대한 그릇된 인식까지 뛰어 넘어보자는 의미의 단체 ‘너머’가 탄생한 것. 현재 ‘너머’는 산업재해 및 체불임금 상담, 의료지원, 고려인 아동·성인 교육 등 고려인들의 전반적인 생활 문제를 돕고 있다. 

하지만 고려인을 지원하겠단 열정도 재정난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김 사무국장은 “월세 40~50만원도 내기가 어려워 지인에게 손 빌린 적도 여러 번이다”고 전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던 건 ‘너머’의 한 독지가 덕분. 그는 재정적인 문제로 고려인 지원 활동을 멈추면 안 된다며 3년간 약 2억 원의 지원금을 전달, 지금까지 단체를 오게끔 한 기반을 마련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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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수업은 주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봉사활동으로 이뤄진다./너머 제공

운영에는 ‘너머’와 뜻을 함께하는 시민들의 힘도 컸다. 김 사무국장은 “야학 수업 등 대부분의 교육이 ‘너머’의 활동가들과 시민들의 재능기부로 진행된다”고 말했다. 시민들 덕분에 안구암에 걸린 고려인 소녀 리 발레리야(7)도 치료받을 수 있었다. 4년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온 소녀 가족의 전 재산은 3백만 원뿐. 4~5천만 원에 달하는 치료비를 감당하긴 턱없이 부족했다. 사연을 접한 ‘너머’는 포털사이트 ‘다음’의 네티즌 모금 서비스 ‘희망해’를 통해 소녀의 이야기를 올리고 모금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시민들이 십시일반 기부해준 액수는 4천만 원에 달했다. 김 사무국장은 “‘너머’로 직접 찾아와 2천만 원을 놓고 간 젊은 엄마들도 있었다”며 “고려인에 대해 공감하고 함께하고자 하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이 참 고맙다”고 전했다. 

‘너머’의 노력에도 불구, 한국에서 고려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김 사무국장은 “고려인은 법적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했다. “고려인은 이주노동자도 아니고, 다문화 정책도 결혼이민자를 대상으로 해 고려인을 포함하지 않죠. 전담 부서가 없다보니 문제가 발생해도 어느 누구도 책임지고 맡지 않아 답답합니다.” 벌써 4대째 한국에서 살아온 고려인 아이들은 더 큰 문제에 직면해있다. 3세대까지만 동포로 인정하는 재외동포법 규정상 고려인 4세대는 ‘외국인’이 돼 3개월마다 출국해서 비자를 받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김 사무국장은 “국내에서 청소년기를 겪으며 한국의 언어, 식습관, 문화를 갖고 있는 아이한텐 돈도 걱정이지만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려인의 강제 이주 역사를 이해하고 고려인 아이들이 앞으로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고민한다면 그들이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사회적 관심과 지원책이 필요합니다.” 

현재 한국에는 4만 명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다. 김 사무국장은 “고려인들이 차별받지 않고, 지역사회와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도 고려인의 학습과 제도 개선을 위해 힘쓸 것”이라며 “민간뿐 아니라 정부 등도 함께 문제를 해결해가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김영은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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