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치는 치마 입기를 좋아하는 남자 초등학생이다. 선생님은 여자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려는 꽁치를 안 된다며 붙잡지만, 친구들은 두 팔 걷고 나서 꽁치를 여자 탈의실로 데려가준다. 친구들은 꽁치에게 왜 치마를 고집하는지 묻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꽁치는 함께 축구를 하고, 공기놀이를 하는 친구일 뿐이다. 치마를 입건 말건, 뭐 어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지난해 6월, 세상에 나온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는 발간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한 크라우드펀딩 프로젝트는 한 달 만에 목표액의 4배인 400만원을 모았다. 정식 출간 후에는 ‘2015 세종도서 교양부문(舊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 선정돼 도서관을 비롯한 공공·복지시설에도 배포됐다. 1쇄로 찍은 1500부는 매진된 지 오래다.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올해 5월에는 여자 짝꿍 꽁치와 뽀뽀하고 싶은 소녀 장미의 이야기를 그린 ‘꽁치랑 뽀뽀하면 안된다고?’가 나왔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600만원의 제작비가 모였고, 펀딩 사이트와 ‘퀴어(Queer·성소수자) 퍼레이드’에서만 판매됐는데도 1쇄 매진이 머지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소수자 그림동화’를 제작한 곳은 ‘이채: 이야기채집단’. 2012년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인연을 맺은 송지은(30·법조인), 엄윤정(27·출판편집자), 정명화(30·로스쿨 재학) 세 사람이 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생업까지 따로 있는 이들은 왜 성소수자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펴냈을까.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이채의 송지은·엄윤정 씨를 만났다. 정명화씨는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소수자 이야기, 동화가 되다
‘널리 찾아서 얻거나 모으는 일’. 채집의 사전적 정의처럼, 이채는 세상 곳곳에 흩어져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기록하는 조직이다. 비혼공동체 등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은 ‘정상가족관람불가展’, ‘퀴어 퍼레이드’ 등 공감에서 활동하며 접했던 다양한 소수자 사례들이 계기가 됐다.
“인턴생활을 끝내고, 각자의 영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후로 다시 모였을 때 ‘소수자에 대한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나왔죠. 기왕이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식 말고, 콘텐츠로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희가 좋아하면서, 직접 제작도 할 수 있는 콘텐츠를 찾다보니 동화를 쓰게 됐습니다.” (송지은)
먼저 출간된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는 치마가 좋은 소년 꽁치와, 그런 꽁치를 지지하는 친구들, 그리고 꽁치를 이해해나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다. ‘사과소녀 선발대회’에 나가려던 꽁치가 엄마에게 치마를 빼앗기자 친구들은 각자의 집에서 치마를 가져온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치마를 찾은 꽁치는 대회에 출전한다. 꽁치가 사라지자 가족들은 치마를 뺏는 일이 꽁치의 일상을 무너뜨리는 일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족들은 대회장으로 향해 ‘치마 입은 꽁치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 적힌 현수막을 들고 꽁치를 응원한다. 꽁치는 환한 웃음으로 그에 답한다. 꽁치의 웃음은 주변인의 한 마디가 차별받는 성소수자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인들에게도 ‘차별에 대해 정색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싶었어요. ’여자면(남자면) 이렇게 해야지‘ ’남자(여자)친구 있어?‘ 같은 말들이 어떻게 보면 우리 중엔 성소수자가 없으리라는 편견에서 비롯된 말이거든요. 질문 받은 친구가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고 있거나, 자존감이 낮은 상황이라면 반박하기 힘들죠. 누군가 이렇게 차별적인 발언을 했을 때, ’그건 잘못됐다‘고 이야기 한다면 소수자는 큰 힘을 받을 거예요. 꽁치의 친구들처럼 꽁치가 꽁치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죠.” (엄윤정)
짧은 그림동화지만, 그 안에 담긴 고민은 여느 장편소설 못지않다. ‘꽁치랑 뽀뽀하면 안된다고?’의 화자인 장미가 ‘남자’의 이미지를 축구공, 바지, 운동화로 떠올리는 장면 역시 긴 토론 끝에 탄생했다. 송지은씨는 “성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다양한데, 이미지를 너무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됐다”고 말했다.
“남녀를 강조하면, 그 가운데 영역들이 소외되지 않을까 걱정이 됐어요.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에 허용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책의 본분이 무엇인지도 계속 논의했고요. 결국 동화라는 그릇에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 없는 만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을 고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교양서가 아니고 그림책이니까요.”
시리즈 1, 2의 꽁치가 각각 ‘치마를 사랑하는 소년’ ‘장미가 뽀뽀하고 싶은 소녀’였듯, 앞으로 나올 꽁치 역시 각기 다른 인물로 그려질 예정이다. 엄윤정씨는 “꽁치 이야기를 시리즈로 만든 이유는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레즈비언 등 여러 성소수자를 다루고 싶었기 때문”이라면서 “꽁치라는 이름으로 시리즈의 일관성을 주되, 최대한 다양한 주제를 담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 꽁치 시리즈는 글작가 정명화씨가 잠시 자리를 비워서, 내년 1월 이후에나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이야기채집단원 모두 각자 생업이 있어서 1, 2권도 퇴근 이후 밤샘작업을 하며 만들었거든요. 즐겁고 보람됐지만, 동화책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렵다는 아쉬움도 있었어요. 2권을 만들면서 ‘이채’를 출판사업자로 등록했는데, 앞으로는 자금을 모아서 창업을 해볼 계획도 있습니다. 저희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는 디자이너, PR전문가, 기획자 등과 함께 대안공동체를 꾸리면 더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엄윤정)
◇다양성 가르치지 않는 사회를 넘어, ‘꽁치’가 행복한 세상 오길
지난해 5월,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가 출간된다는 보도에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이런 책을 아이들에게 읽히는 선생님이 있다면 교육부에 신고하겠다’는 호모포비아적 댓글부터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는 글까지 부정적인 의견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이채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다양한 성정체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성역할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것을 잘못된 것, 배제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게끔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꽁치 시리즈는 ‘남자다운’ 왕자님과 ‘여자다운’ 공주님이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만 가득한 동화를 보며, 스스로를 의심해야 했을 성소수자들에 대한 위로이기도 하다.
“유럽에서는 학교 성교육 시간에 성소수자 개념을 가르칩니다. 너무 당연해서 ‘교육 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아예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죠. 반면 한국에서는 아직 말을 꺼내는 것조차 어려워요. 외면한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꽁치 그림책을 읽는 아이들은 적어도 나와 다른 사람을 보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길 바랍니다. 다르다고 잘못된 건 아니니까요.” (엄윤정)
아동·청소년기부터 다양한 성 정체성에 대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이미 국제사회의 중론이다. 2009년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국제 성교육 가이드라인’에는 ‘성정체성에 대한 편견, 그에 따른 사회적 관행과 차별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반면 지난해 3월 우리나라 교육부가 발표한 ‘성교육 표준안’은 ‘성소수자에 대한 지도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다양한 성정체성과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엄연히 사회구성원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교육과정에서 지워버린 처사다.
이채는 앞으로도 동성애자·양성애자·무성애자·트랜스젠더 등 최대한 다양한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꽁치 시리즈를 5권으로 계획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퀴어 콘텐츠들이 더 많이 생산돼서 소수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어요. 치마를 입는 남자가, 동성에게 뽀뽀하고 싶은 여자가 ‘별종’이 아닌 세상에서 꽁치들이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송지은)
꽁치가 어떤 세상에서 살길 원하는지 묻자, 엄윤정, 송지은씨는 “‘꽁치 이야기’가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라 답했다. ‘꽁치 시리즈’는 남다르다는 이유로 변두리로 밀려나는 이들이 듣고 싶었던 말을, 그리고 그 친구들이 해주고 싶었던 말을 대신하는 듯하다.
조은지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6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