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장
청각장애인들에게 ‘책’은 ‘암호’로 가득 찬 문서다. ‘보는 것’은 문제가 없으니, ‘읽는 것’은 쉽지 않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청인들은 어릴 때부터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과정을 통해 ‘언어 능력’이 자연스럽게 발달되나, 농아인(聾啞人·청각장애로 수화를 쓰는 사람)들은 듣는 단계에서부터 장벽에 막힌다.
“청각장애인 아이들을 만났는데, 책을 못 읽는 거예요. 금도끼은도끼, 선녀와 나무꾼도 몰라요. 농인들이 자라온 환경이 그렇습니다. 이들을 위한 그림책, 동화책이 전무하죠. 청각장애인에게 한국어가 제1언어가 아니더군요. 그렇다면 이들의 언어인 ‘수화언어’로 책을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강화평(31)씨가 지난 2013년,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 콘텐츠를 제작하는 (예비)사회적기업 열린책장을 창업한 이유다. 20대 중반부터 온라인 교육 벤처 창업 멤버로 4년 가량 일하며, 회사를 엑싯(Exit᠂ 투자 회수)한 경험까지 있었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좋은 일을 하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던 강씨. 그는 ‘사회적기업’이란 개념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사업을 구상하게 됐다.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며, 지역아동센터에서 실습를 하던 그는 “모든 아이들에게 책 읽는 기회는 공평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부자들의 책장을 보면 서재에 멋있는 그림도 걸려있고, 무려 사다리를 타고 책을 꺼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저희 집에는 책이 별로 없었어요. 20살까지는 책을 거의 안 읽었는데, 군대에 가서 책을 많이 읽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더라고요. 거의 하루에 1권씩 읽었어요. 이 좋은 걸 어릴 때부터 경험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본인의 어린 시절에 보상을 하기 위해서라도, 책 읽기가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싶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책’과 가장 거리가 먼 아이들은 바로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청각장애인 아이들에게 먼저 ‘동화’를 읽히고 싶었다.
강씨가 구상한 열린 책장의 사업 모델은 수화영상 도서를 각 도서관에 납품하는 것. 하지만, 도서관의 문턱은 높았다. 기본적으로 “왜 수화영상 도서가 필요한지”에 대한 공감대가 전혀 만들어져있지 않았다. 강씨는 “대전에 도서관에 10개가 넘게 있는데 수화영상 도서가 있는 곳은 1곳 밖에 없다”면서 “심지어 사서들의 80%가 ‘수화영상 도서’가 뭐냐고 반문하더라”고 말했다.
판로가 막혔으니,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2015년, 강씨는 다음 카카오 ‘스토리펀딩’을 통해 전국 도서관에 수화영상 도서를 전달하기 위한 모금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도서관이 수화 영상 도서를 사주질 않으니, 오히려 기부하겠다는 ‘야심찬 발상’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했나. 열릭책장의 청각장애인 디자이너 지혜진(24)씨가 디자인한 카카오톡 수화 이모티콘 ‘히로와 나누는 사랑의 수화’가 출시 한 달 동안 다운로드 1위를 차지한 것. 다음 카카오는 농아인의 날(6월 3일)을 맞이해, 하나를 구입하면 1000원씩 기부하는데 동참하며 한 달 판매 수익으로 2300만원이 모였다. 이렇게 모은 기부금으로 수화영상 도서10권을 제작했고, 콘텐츠가 담긴 DVD를 전국 도서관 1000곳에 무료로 배포했다(택배비만 3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수화영상 도서만 만드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는 아프리카TV를 통해 ‘수화방송국’을 론칭, 수화콘서트와 토크쇼 방송도 진행했다. “먼저 아동용 콘텐츠를 만드는데 집중하려고요. 카메라도 4대 샀어요. 예전에 사무실이 되게 작을 때는, 사무실은 3등분해서 스튜디오도 만들고, 도서관도 만들었다니깐요.” 한 달 전, 대전시농아인협회 옆 사무실로 이전한 열린책장은 촬영을 위한 공간도 따로 조성했다. 앞으로는 수학, 영어 등 학습 콘텐츠 제작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열린책장이 제작한 다양한 콘텐츠들은 청각장애인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주고 있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꿈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 강화평씨는 “특히 청각장애인 디자이너가 ‘히로’라는 카카오톡 이모티콘 캐릭터를 만든 것이 유의미한 것 같다”고 했다.
“카카오 프렌즈가 인기를 얻는 것처럼, 청각장애인들 사이에서는 ‘히로’가 인기 캐릭터입니다. 간단한 수화를 이모티콘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됐으니깐요. 사실 아이들한테 꿈을 물어보면, 예전엔 답이 많지 않았어요. 대부분 수화통역사나 복지관에서 일하는 사람 정도였죠. 그런데 이젠 디자이너가 되겠다, 혹은 수화방송국을 만들겠다. 한 친구는 PD를 하고 싶다고까지 말하는 친구들이 생겼어요. 영상 편집은 사운드가 필수이기 때문에 상상도 못한 직업군이었죠. 이제 가능성을 발견하고, 도전을 결심하게 됐다니, 정말 놀랍지 않나요?”
대전 = 김경하 더나은미래 기자
* 이 콘텐츠는 더나은미래와 열린책장의 ‘대전 사회적기업 현장 탐방기’ 프로젝트로 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