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비영리단체 울리는 ‘폰트 저작권’

지난해 9, A 복지단체의 사무실로 내용증명 하나가 날아들었다. 단체가 1년 전 만든 바자회 홍보 포스터에 특정 업체의 폰트가 무단으로 쓰였다며 저작권법을 위반했다는 내용이었다. 오래전 일인데다 자원봉사자가 만든 것이라 단체의 답변이 늦어졌는데, 폰트업체의 위임을 받은 법무법인은 대뜸 500만원짜리 폰트 프로그램의 견적서를 보내 구매하라고 압박했다. 구매할 여건이 안된다며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A단체는 결국 형사고발까지 간 끝에 폰트 업체에 100만원을 내고 합의를 했다.

최근 비영리 현장에서 폰트 사용에 관한 내용증명을 받았다는 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 비영리단체에 법률 자문을 제공하는 재단법인 동천에 따르면, 지난 1년 반 동안 정식으로 접수된 저작권법 관련 문의만 15건이 넘는다. 구두로 문의한 사례까지 포함하면 숫자가 훨씬 더 많다단체들이 받은 내용증명은 대체로 비슷한 형태다. 유료 폰트를 사용해 제작한 이미지나 PDF 파일 등에 대해 폰트 프로그램의 출처를 소명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저작권을 침해했을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저작권법 제136조 제1)’는 벌칙 조항을 명시하며, 고액의 폰트 패키지 구매를 유도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내용증명이 무차별적으로 발송된다는 것. 서울시NPO지원센터도 지난 5월 홈페이지에 다른 기관이 제작한 PDF 파일의 링크를 공유했다가 내용증명을 받았다한데레사 서울시NPO지원센터 경영지원실장은 “다른 기관이 만든 컨텐츠의 링크를 게시했을 뿐인데 내용증명을 받아 황당했다고 말했다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는 지난 3년 동안 폰트 관련 내용증명을 4번이나 받았다센터 담당자는 “한글 프로그램을 설치하면 제공되는 기본 번들 폰트가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인식되는데이를 사용해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면서 “당시 ‘업체가 약관에 관련 규정을 제대로 공고하지 않았다’고 항의해 사건을 무마했는데, 이후에도 매번 다른 건으로 연락이 왔다며 답답해했다. 

실제로 저작권법을 침해한 것은 어떤 경우일까. 저작권법의 적용을 받는 것은 ‘폰트 프로그램’이다. 불법 복제한 폰트를 다운받는 등 이를 무단으로 이용할 경우, 저작권법 침해에 해당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A단체처럼 폰트를 이용한 사람이 불분명한 경우다. 송시현 동천 변호사는 “비영리단체는 인턴이나 자원봉사자가 카드뉴스나 포스터 등을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누가 불법 폰트 프로그램을 내려받았는지 알아내기가 어렵다”며 “제3자가 내려받았다면 단체의 직접적 책임은 없지만, 단체 직원이 이용했을 경우엔 저작권 침해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폰트업체가 폰트 파일을 ‘개인 또는 비영리 목적에 한해 무상 이용할 수 있다고 명시해 배포한 경우도 분쟁거리가 될 수 있다단체 입장에서는 이를 비영리단체는 이용 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이용약관을 보면 비영리단체의 폰트 이용을 영리적인 행위로 규정한 업체들이 많다수년간 폰트 저작권 침해 사례에 대해 공익소송을 지원해온 ‘사단법인 오픈넷의 박지환 변호사는 “비영리 목적으로 무상 이용할 수 있다는 조건이 달린 폰트를 사용했을 경우비영리단체에는 저작권법 침해 소지가 없다고 봐도 된다”며 서울시 산하의 한 기관이 행사를 홍보하는 포스터에 비영리 무상 이용 조건의 폰트를 사용했는데, 수사기관이 이를 ‘혐의가 없다’고 판단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법률 전문가들에 따르면, 저작권 침해 여부가 불분명하거나 단순히 이용약관을 위반한 경우에는 사실상 형사고소가 어렵다. 내용증명을 받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합의를 진행하거나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박지환 변호사는 실제 사용한 폰트는 하나인데 폰트 100개 패키지를 사면 고소하지 않겠다는 업체, 고소를 취하하겠다며 100만원 이상의 과도한 합의금을 요구하는 업체들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폰트 업체들의 저작권 관련 합의금 장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학교나 구청 등 지자체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이뤄지던 게 최근 몇 년 새 비영리 영역까지 옮겨갔다는 분석이다. 박지환 변호사는 “업체들의 수법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단체 컴퓨터에 있는 폰트들을 조사해 워드프로세서나 윈도우의 폰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삭제하는 게 가장 좋다며 “예쁜 폰트가 필요하다면 공공에 기부된 폰트를 사용하거나 이용조건이 명확히 확인된 폰트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체는 직원을 대상으로 연간 1회 가량의 저작권 관련 교육을 시행하는 것도 예방을 위한 방법이다. 재단법인 동천은 최근 ‘NPO운영워크숍’을 열어 비영리단체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폰트 저작권 대응방법’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다면서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이런 기회를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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