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목)

유럽만큼 좋은 급식 만들고 싶어서… 한 달간 점심·저녁 스파게티만 먹었죠

행복도시락 ‘공공 급식 개혁 프로젝트’ 참여한 어윤권 셰프
이탈리아 유학시절, 레스토랑보다 수준 높은 급식에 놀라
좋은 재료에 맛과 멋까지… 단가 맞추기 급급한 한국과 달라
직원 9명과 한 달간 매달려… 이탈리안 도시락 3종 개발

어윤권 셰프는 26년 경력의 이탈리안 요리사로, 현재 서울 청담동에 이탈리안 레스토랑 ‘에오’를, 현대백화점 압구정점에선 이탈리아 음식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SK 행복나눔재단 제공
어윤권 셰프는 26년 경력의 이탈리안 요리사로, 현재 서울 청담동에 이탈리안 레스토랑 ‘에오’를, 현대백화점 압구정점에선 이탈리아 음식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SK 행복나눔재단 제공

“스파게티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에오’의 대표이자 총주방장인 어윤권(45) 셰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가 자신의 주 종목에 신물이 난 이유는 뭘까.

“스파게티를 도시락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최고의 타이밍을 찾는 과정이 험난했어요. 조금만 어긋나도 면이 불거나 국물이 생겨서 제 맛을 잃었죠. 한 달 동안 수도 없이 실패했는데, 그 불량품이 고스란히 전 직원의 점심·저녁이 됐어요.”

26년 경력의 베테랑 셰프를 애먹인 미션은 행복도시락 사회적협동조합(이하 행복도시락)이 기획한 공공 급식 개혁 프로젝트. 결식아동이나 독거노인에게 공공 급식을 제공하는 행복도시락이 영국의 공공 급식 혁명을 벤치마킹한 것이다.(지난 2003년 영국의 스타셰프 제이미 올리버(Jamie Oliver)가 진행한 학교 급식 개선 프로젝트는 건강한 식자재 사용과 메뉴 구성으로 학교에서 ‘정크푸드’를 몰아내고, ‘공립학교 급식개혁법안’ 제정으로 이어지는 등 영국 학교 급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난 5월부터 진행된 이 프로젝트에 레스토랑 ‘에오’의 전 직원 9명이 매달렸고, 7월 첫 주, ‘라구(ragout·미트소스의 일종) 스파게티’ 등 3종의 이탈리안 도시락 레시피가 개발돼 행복도시락에 전해졌다. 순수하게 재능기부만으로 이뤄진 성과다.

어윤권 셰프는 자타 공인 국내를 대표하는 이탈리안 요리사다. 세계 최고급 호텔 중 하나인 이탈리아 밀라노의 ‘포시즌호텔'(Four Seasons Hotel) 셰프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 졸업 즈음까진 꿈도 희망도 없었다고 한다. 열아홉 살 때 우연히 구경했던 모 특급호텔 주방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신세계이자 별천지였어요. 무조건 요리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죠. 공부를 못해서 대학은 꿈도 못 꿨고, 지인 소개로 간신히 호텔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됐어요.”

주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봤단다. 청소·빨래·설거지는 물론, 막힌 하수구를 뚫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요리’란 걸 만들기까진 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한번 ‘손맛’을 본 뒤엔 탄탄대로였다. 서울의 세종호텔, 힐튼호텔 등을 옮겨 다니며 무려 9년간 셰프로서의 위용을 구가했다. 하지만 1995년, 그의 질주에 제동이 걸렸다.

미상_사진_재능기부_스파게티_2015

“한참 기고만장할 때 국제 요리대회에 나갔다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세계 수준이 너무 높은 거예요. 자동차로 비교하면 ‘포니’와 ‘벤츠’ 정도의 차이였어요. 세계의 벽을 실감했죠.”

그 길로 유학길에 올랐다. 자연 친화적이고 창조적인 요리 부분에선 세계 최고로 꼽히는 이탈리아가 행선지였다. 이탈리아에서의 7년. 그를 가장 놀라게 했던 건 유럽의 공공 급식 수준이었다.

“처음 학교에서 급식을 받았는데 입이 딱 벌어졌어요. 한국에서 잘나간다는 이탈리아 레스토랑보다 수준이 높았죠. 복지시설·공공기관·대규모 행사장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어요. 특히 아동 쪽은 더 훌륭했죠. 좋은 원재료, 화학조미료에 대한 엄격한 기준, 잘 설계된 영양 균형, 맛에 멋까지 신경 쓴 메뉴. 단가에 맞춰 만들기에만 급급한 우리나라완 정말 딴판이더라고요.”

그런 그에게 직접 공공 급식 제작에 참여할 기회도 주어졌다. 현지에서 이탈리아의 3대 셰프로 불리던 세르조 메이(Sergio Mei)에게 배웠는데, 그에게 급식 컨설팅 의뢰가 쏟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갖가지 경험을 함께할 수 있었던 것. 단체·기업·학교 등 수많은 곳의 급식 준비부터 시작해 메뉴 기획·개발까지 영역을 넓혀갈 수 있었다.

“충분히 좋아 보이는 곳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를 요구했어요. 의식의 차이가 확연한 거죠. 유럽 사회의 경쟁력이 이런 힘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었고, 우리나라의 공공 급식이 하루빨리 개선돼야 한다는 것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런 그에게 행복도시락의 메뉴 개발 프로젝트 제안은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자, 해야 하는 일로 여겨 단숨에 받아들였다”고 한다. 조건은 녹록하지 않았다.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는 영양 가득한 특식 메뉴 ▲조리 후 배달·식사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3~4시간임을 고려하여 식감과 시각적 요소를 지킬 것 ▲100인분 기준 레시피 ▲전국 아동 급식의 평균 단가(4000원)를 고려할 것 등이었다. 최강종 행복도시락 이사장은 “일반적인 도시락 메뉴를 탈피하면서도 아이들이 좋아하고, 영양도 균형 잡힌 특별 메뉴를 제공하고 싶었다”고 했다.

어윤권 셰프는 스파게티 100인분을 만들어 지인들과 품평회를 갖는 등의 노력으로 메뉴의 완성도를 높였다. /SK 행복나눔재단 제공
어윤권 셰프는 스파게티 100인분을 만들어 지인들과 품평회를 갖는 등의 노력으로 메뉴의 완성도를 높였다. /SK 행복나눔재단 제공

까다로운 조건을 맞추기 위해선 최고의 실력자가 필요했다. 어윤권 셰프를 비롯해 박찬일(로칸다 몽로 오너 셰프·이탈리아), 김은희(더 그린테이블 오너 셰프)·봉준호(극동대학교 호텔외식조리학과 교수·이하 프랑스), 강민구(밍글스 오너 셰프)·김승이(양출쿠킹 오너 셰프·이하 아시아), 육향성(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셰프·중식), 박정석(레스토랑 ‘오늘’ 총괄셰프·한식), 김동원(잇츠크리스피 오너 셰프·베이커리) 등 특급 요리사들이 자발적인 참여 의사를 밝히며 속속 합류했다.

어윤권 셰프는 “워낙 쟁쟁한 셰프들이 함께해서 약간의 경쟁심이 일기도 했다”며 웃었다. 그래서인지 총 100인분이 넘는 도시락을 만들어 자녀가 있는 지인들에게 돌리고, 품평을 부탁하는 등 완성도를 높이려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번에 그가 개발한 이탈리안 도시락 메뉴는 오는 8월 중 1차적으로 행복도시락이 대상으로 하는 결식아동 등의 공공 급식에 시범 적용될 예정이다. 어윤권 셰프는 이번 프로젝트를 비롯해, 지난 2012년부터 ‘SK뉴스쿨'(구 SK해피스쿨)에서 재능기부 활동을 펼치는 등 각종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항상 ‘본연의 임무’를 강조한다. 최근 불고 있는 ‘쿡방'(요리와 방송의 합성어) 열풍이 흥미로우면서도 조심스러운 이유다.

“방송 탓인지, 최근 우리 직원들의 화장도 점점 짙어지고 있어요(웃음). 요리사들이 방송에 나와 기쁨을 줄 수 있으면 참 좋죠. 하지만 요리사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건강하고 맛있는 최고의 요리를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소위 요리사의 사회적 책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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