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목)

실버영화관, ‘설 자리’ 잃은 어르신에게 ‘일자리’를 선물하다

허리우드 클래식-실버영화관

종로 낙원상가 4층에 있는 ‘실버영화관’ …평일·주말 상관없이 어르신들로 인산인해…자막 크기 1.5배 키우고 티켓 값도 저렴

직원·자원봉사자들도 70~80代로 구성…노인들의 일자리 창출로 지역 생태계 바꿔

올해 1월 기준, 우리나라 인구 5134만여 명 중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총 650만명. 전체 인구의 10%를 훌쩍 넘겼다. 반면, 노인 빈곤율은 48%로, 대표적 고령국가인 일본(19.4%), 독일(10.5%)과 비교해도 매우 높다(2012년). 고령자가 경제, 사회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분야도 제한적이다. 취업한 노인의 52.9%가 ‘농·어·축산업’ 26.1%가 ‘단순노무직’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2011년, 복지부). 국가예산에 기댄 공공형 저임금 노인 일자리가 아닌, 민간영역의 새로운 일터는 없을까. 국내 최초의 고령자 전용 영화관이자 사회적기업 타이틀을 가진 ‘허리우드클래식-실버영화관(이하 실버영화관)’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누적 관객 100만명을 돌파할 예정인 이곳을 직접 찾았다. 편집자 주


 

지난 2월 26일 목요일 11시. 서울 종로 낙원상가 4층에 위치한 실버영화관 앞은 상영관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300석짜리 상영관을 꽉 채우는 것도 모자라 보조석도 종종 등장하고, 서서 보는 관객까지 있을 정도다. 황일랑(72)·박달성(70) 부부 역시 실버영화관으로 오랜만에 데이트를 즐기러 나왔다.

실버영화관의 자원봉사자와 직원들. /이현수 사진작가
실버영화관의 자원봉사자와 직원들. /이현수 사진작가

“5년 전부터 한 달에 한 번 이상 여기서 영화를 보고 있어요. 개봉작을 보러 가끔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갈 때도 있지만 실버영화관은 특별하거든. 우리 같은 노인들 배려를 참 많이 해줘요. 자원봉사자들이 손전등으로 자리 안내도 해주고, 영화 제목도 알려주니 참 좋죠.”

2009년 1월, 김은주(41) 추억을파는극장 대표가 멀티플렉스에 밀려 폐관 위기에 놓였던 ‘허리우드 영화관’을 실버영화관으로 재개관했을 당시, 사람들은 실패를 점쳤다. 극장 운영에 드는 고정비용만도 한 달에 1800만원. 만만치 않은 자본이 필요했지만 김 대표는 “상업적 성공을 기대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과거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종로. 그곳의 주인공이었던 어르신들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대접받기를 바랐을 뿐이다.

“처음 개관했을 땐 매달 2000만원씩 적자가 났죠. 이제는 일평균 800명까지 극장을 찾고 있어요. 곧 있으면 누적 관객 100만을 돌파할 예정입니다. 내년부터는 흑자 전환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관객에게 영화에 대해설명 중인 김은주 추억을파는극장 대표. /이현수 사진작가
관객에게 영화에 대해설명 중인 김은주 추억을파는극장 대표. /이현수 사진작가

이곳이 입소문을 탄 이유는 하나부터 열까지 어르신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실버영화관은 55세 이상 관객에게 티켓을 2000원에 판매하고 있다. 일반 관객에 비해 5000원 저렴하다. 자막 크기도 평균보다 1.5배 이상 키웠다. 고전영화도 HD마스터링 버전으로 재수입해 상영한다. 관객들이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실버영화관에서 봐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3년 전, 모자란 영화관 운영비를 충당하다 신용불량자가 될 뻔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실버영화관을 자주 찾던 어르신이 제게 만둣국 한 그릇을 먹이시고는 흰 봉투에 공증도 없이 3000만원을 넣어 빌려주셨어요. ‘내가 줄 수 있는 돈이라 다행이다’ 하시면서요. 이렇게까지 관객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건가 싶었죠.”

◇노인의,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저기 테이블 앞에 가서 휴대폰 번호 적으시면 영화 상영 정보를 문자로 보내드려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보셨어? 다음주에 상영되는 작품인데 정말 감동적이에요. 추천! 추천!”

실버영화관 자원봉사자가 관객을 안내하고 있다. /이현수 사진작가
실버영화관 자원봉사자가 관객을 안내하고 있다. /이현수 사진작가

실버영화관의 관객 안내 업무를 맡고 있는 이정덕(72)씨가 여성 관객과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노란 어깨띠의 자원봉사와 직원은 실버영화관을 이끄는 또 하나의 동력이다. 자원봉사자 15명 모두, 정직원 중 매표담당 한 명을 제외한 8명 전부가 65세 이상 노인으로 고령자 중에서도 취업 기회가 적은 70~80대 어르신을 우선 선발하고 있다. 자원봉사자의 성실도와 건강 상태를 고려해 정직원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5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실버영화관에서 활동했고 이 중 60%가 채용 제안을 받았다.

2013년, 영화관 바로 옆 건물에 문을 연 DJ카페 ‘추억더하기’는 김 대표가 세운 또 하나의 ‘일터’다. 서울시·하나은행·실버문화복지협회가 손잡고 아예 ‘고령자친화기업(민간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양질의 노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으로 출발했다.

추억더하기의 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40년 경력의 베테랑 DJ 장민욱(61)씨는 생계를 위해 이삿짐센터 등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이곳에서 삶의 안정을 찾았다. 5년 전, 신문기사를 본 장씨가 실버영화관을 무작정 찾아가 “재능기부 형태로 디제잉을 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고, 김 대표는 “어르신들이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아예 제대로 출근하시라”며 3개월 만에 그를 정식으로 채용했다.

보건복지부_그래픽_노인_노인취업현황_2015◇사회적 경제, 노인 일자리 문제 푸는 실마리

롤모델 하나 없이 시작했지만 실버영화관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 중이다. 다음 달에는 바로 옆 ‘시네마테크’를 제2상영관(낭만극장)으로 넓힌다. 상영관 확대와 발 맞춰 뷰티살롱도 개설한다. 메이크업 강좌도 듣고, 차도 마실 수 있는 여성 어르신 전용 공간으로 직원은 미용업계 종사 경험이 있는 65세 이상 고령자로 선발할 예정이다.

김 대표는 뷰티살롱 역시 사회적기업으로 인증 신청할 마음을 굳혔다. 흑자 전환되면 살롱직원 어르신께 소유를 이전할 계획도 갖고 있다. 노인문화·일자리사업 영역에 ‘제2, 제3의 김은주’를 만드는 것이 그의 전략이다.

“사회적기업은 시장에서의 자생능력만 있으면 계속 경영할 수 있어요. 예산에 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정부사업과는 다르죠.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는 대내외적 정체성은 실리만 좇지 않도록 고삐를 잡아줍니다. 저는 이 사업을 길게 보고 있어요. 종로를 어르신 문화특구로 만들 생각입니다. 어르신들이 누구나 주체적으로 일하고, 문화 콘텐츠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이 지역의 생태계를 바꾸는 거죠.”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