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공간만 나눈 게 아니에요 행복한 삶을 공유하죠

주거 빈곤 청년 위해 결성… 청년 주택협동조합 ‘민달팽이’

조합서 전세금 7억 부담… 청년에게 싸게 제공
입주자 13명끼리 식사하며 이해심 배워나가
“주택조합 형태가 퍼지면서, 공동체 확산 되길”

“남들은 휴일을 좋아했지만 전 반대였어요. 집에 있는 게 싫었거든요.”

얼마 전까지 노량진의 한 고시원에 살았던 함금실(29·여)씨의 말이다. 함씨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마음에 발품까지 팔아가며 월 32만원짜리 방을 구했는데, 방은 비좁고 다닥다닥 붙어있어 방음도 전혀 안 됐다”고 했다. 충남 아산에서 서울로 대학을 다녔던 김해랑(25·숙명여대)씨는 대학 졸업 즈음에 6시간이 넘는 통학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김씨는 “처음 2년은 하숙집에서 살았는데, 월 45만원이나 되는 방값이 너무 부담이 됐다”며 “이후 KTX로 통학했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반값인 누리로 열차로 바꿔 타야 했다”고 말했다. 한기돈(26·연세대)씨는 학교 근처 신촌 유흥거리에 있는 고시원에 살았었다. “거기도 45만원으로 비쌌는데 너무 열악했다”고 토로했다. 함금실, 김해랑, 한기돈씨는 현재 한 공간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쾌적하고 저렴한 데다, 시끌벅적 사람 소리가 가득한 ‘민달팽이 집’에서다.

◇궁핍·안전·고독… 청년 주거 문제 주택조합이 해결한다

지난달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가 발표한 ‘대학생 원룸 실태 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대학생 1200명 중 화재가 날 경우 대책이 없어 불안하다는 비율이 42.1%였고, 방범 시설이 부족해 불안하다는 대학생도 29.8%나 됐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 스스로 주거 문제 해결책을 찾자며 나선 게 바로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이다. 2013년 6월 창립 대회를 연 이후, 작년 7월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서 집 두 채를 빌려 ‘민달팽이 집 1호’로 시범 운영 했고, 지난해 12월엔 5층짜리 건물 전체를 임차해 ‘민달팽이 집 2호’를 꾸렸다.

기자가 직접 찾은 2호 주택은 멀리서 봐도 눈에 띄었다. 낡고 흔한 옛날식 벽돌집 사이에 솟은 신축 건물로, 5층 전체가 상아색의 파스텔톤이었다. 2층과 3층, 4층은 복층 구조인데, 모두 46~60㎡(14~18평) 정도였다. 층마다 독립된 방 2개와 방 사이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거실, 드럼 세탁기가 설치된 주방과 샤워 시설이 구비된 화장실이 갖춰져 있었다. 이런 곳의 한 달 월세 가격이 보증금 60만원에 월 23만원(2인 1실 기준). 기자가 민달팽이 주택이 위치한 남가좌동 근방 부동산 중개소 대여섯 곳을 찾아가 본 결과, 가장 값이 저렴한 곳이 보증금 500만원에 월 20만원이었다. 그마저도 방음·방한은 물론 치안조차 불안한 환경으로, 벽에는 곰팡이가 나 있고 화장실에는 마땅한 샤워 시설도 없는 곳이었다.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330-28번지에 신축한 민달팽이 집 2호에서 입주자들이 단체 사진을 촬영했다.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 제공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330-28번지에 신축한 민달팽이 집 2호에서 입주자들이 단체 사진을 촬영했다.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 제공

저렴한 가격과 쾌적한 주거환경까지…. 이 집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임소라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 경영지원팀장은 “협동조합이 이 주택 주인과 전세금 7억원에 먼저 계약한 후 청년들에게 저렴하게 월세로 내놓은 것”이라고 했다. 전세금 7억원을 마련한 과정도 흥미롭다. 우선 조합원 150여명의 출자금, 기존 민달팽이 주택 후원자 30여명의 원조, 은행 대출 등으로 우선 2억원을 마련했다. 조합원은 1인 1구(5만원) 이상 출자금을 내고, 입주자들은 6구(30만원) 이상을 내야 한다. 나머지 5억원은 연 2%, 5년 후 상환 조건으로 재단법인 한국사회투자가 위탁 운영 중인 서울특별시 사회투자기금으로부터 융자 조달했다. 협동조합 측이 1년간 공들여 준비한 결과다.

◇’싸게’ 사는 것 아닌, ‘함께’ 사는 사람들의 공간

현재 민달팽이 집 2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총 13명이다.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 덕분에 여성 거주자가 8명이나 된다. 지난달 31일 저녁, 젊은이들만 사는 건물에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가득했다. 대학에서 요리를 전공한 김규원(27·여)씨가 솜씨를 발휘했다. 임소라 팀장은 옆에서 돈가스를 튀겼고, 201호 입주자 송현정(29·여)씨와 402호에 사는 한기돈씨도 합류했다. 특별한 이슈가 있는 건 아니다. 혼자 밥을 차리다 갑자기 사람들을 모으기도 하고, 지나가던 발길을 멈춰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한다. 40분가량 식사시간 동안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오랫동안 알던 이들처럼 편하다. 김규원씨는 “한 달 동안 지내면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없었던 날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지난해 12월 말 동시 입주해 이제 한 달 남짓 함께 산 입주자 13명이 이렇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두 달에 걸친 철저한 사전 면접을 거쳤기 때문이다. 한기돈씨는 “입주 계획서에 자기소개는 물론 ‘공동체”친함’과 같은 추상적 개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고 ‘입주 후 자신이 맡고 싶은 역할과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서도 적어냈다”면서 “대학 논술 시험보다 더 힘들더라”며 웃었다. 송현정씨는 “입주하기 전 두 번 워크숍을 거쳤는데, 아침에 모여 해 질 때 헤어질 정도로 열의 있는 자리였다”면서 “그런 시간들을 통해 서로에 대해 정말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민달팽이 주택은 단순히 싸기 때문에 좋은 집이 아니다. 실제로 경제적인 목적만을 위해 입주를 신청했다가 워크숍 과정을 거치며 입주를 포기한 사람도 많다. 임소라 팀장은 “공실에 따른 비용 부담보다 공동체가 깨지지 않고 잘 유지되는 것이 우리에겐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들의 공동체 정신은 집 안 곳곳에 배어 있다. 현관문 쪽 벽면에 붙어 있는 ‘깜짝 생일파티를 해줘 고마워’ 같은 쪽지는 친밀함을 드러내며, 실내화를 신고 건물 전체를 다닐 수 있는 구조도 건물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사랑방임을 잘 보여준다.

공동체인 만큼 규칙은 확실하다. 룸메이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방에서는 자는 것과 쉬는 것 이외의 활동을 할 수 없고, 매달 첫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회의에도 참석해야 한다. 1일 저녁 진행된 입주자 회의에선 ‘함께 책을 공유할 미니 도서관’ ‘문패 만들기’ ‘설맞이 만두 빚기’ 등의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기도 했다. 함금실씨는 “다른 사람 때문에 불편을 느끼기보단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더 커졌다”며 “함께 다양한 이슈의 대화를 하고 텃밭을 만들기도 하면서, 삶의 질이 훨씬 좋아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김규원씨는 “집에 가면 막연히 늘어지곤 했는데, 공동생활을 통해 좋은 점은 배우고 나쁜 점은 버리는 등 삶의 자극을 받는다”고 했다.

◇공간을 넘어, 삶을 공유하는 진짜 공동체 확산됐으면…

민달팽이 집 입주자들의 소망은 이런 공동체가 마을과 사회로 확산되는 것이다. 임소라 팀장은 “최근에 마을 공동체가 활성화되고 있는데, 우리 같은 주거 형태가 주변 마을로 퍼지면서 마을 활성화에 이바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민달팽이 집 2호 1층 건물에 설치된 그네 두 개는 동네에 개방된 공간이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심심찮게 타보곤 하는데, 민달팽이 주택 사람들은 이들을 막거나 내쫓지 않는다. 오히려 꼬마가 그네를 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함께 보며 즐기고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안전주의’ 팻말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

이제는 댐 건설로 수몰 지역이 된 전남 장성군 삼계면에서 출생했다는 김강(27)씨는 “어렸을 때는 빨리 도시에 가고 싶었는데 클수록 동네 형들과 개울에서 멱 감고 놀던 추억이 떠오른다”며 “마을이 주는 향수를 우리 동네에서 회복할 수 있다면, 분명 지금보단 더 재밌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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