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한국전쟁부터 세월호까지… 우린 국민 情 전하는 심부름꾼이죠”

김영태 구세군 업무국장

김영태 구세군 업무국장
김영태 구세군 업무국장

“1984년 겨울, 구세군사관학교에 들어간 후 첫 자선냄비 봉사를 명동으로 나왔어요. 근데 마침 우리 바로 옆에서 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모금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왠지 불편했죠. 그렇게 어색한 한나절이 지났는데, 그 스님이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종일 모은 걸 전부 구세군 자선냄비에 넣더라고요. ‘이게 구세군의 힘이구나’ 싶었죠.” 김영태(58·사진) 구세군 업무국장의 말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간 교회에서 구세군과 첫 인연을 맺은 김 국장은 구세군사관학교, 전라·충북 지방 책임자, 구세군 본부 재무부 등을 거치며 평생을 구세군과 함께 해왔다. 현재는 구세군의 자금·토지·물품·정보 등을 총괄하는 업무국의 수장(首長)이다.

지난 30년간, 찬 바람이 불 때쯤엔 어김없이 거리에서 종을 흔들었던 김 국장은 구세군 자선냄비의 강점에 대해 “대국민 모금 통로로서 갖는 정통성과 대표성”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너무 힘들 때 무임승차를 했다며 뒤늦게 기차 삯을 내거나, 지난 과오를 반성한다는 편지와 함께 수백만원을 기부하는 분도 있어요. 우리 국민의 대표 모금이란 생각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죠.” 실제로 구세군자선냄비에는 해마다 대통령의 금일봉부터 유치원생의 저금통까지, 650만 국민의 다양한 돈이 사연과 함께 쌓인다. ‘가장 어려운 순간 받았던 도움을 이제야 갚는다’는 익명의 기부자도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김 국장은 “1998년 ‘IMF 사태’로 인해 모두가 힘들었을 때도 자선냄비를 향한 온정의 손길은 줄지 않았었다”면서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국민의 마음을 전하는 심부름꾼’이라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그런 신의(信義)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부랑아와 노숙자를 도우며 시작했던 자선냄비가, 한국전쟁 이후 고아들이 양산됐을 땐 그들을 돕는 역할에 주력했어요. 눈·비 같은 자연재해로 피해가 커지면 재해민들의 복구에 집중하기도 했죠. 이젠 우리도 잘사는 나라가 됐지만 상대적으로 노인·아동·미혼모·장애인·실직자·지역사회 등엔 빈틈이 더 많아져서 그곳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어요.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사건, 구룡마을 화재 때는 몇 달씩 현장 구호작업을 했고요. 돈을 전하는 게 아니라 국민의 뜻을 전하는 겁니다. 자선냄비 돈은 곧 국민의 돈이니까요.”

올해 연말도 국민의 마음을 모으는 종소리가 울려 퍼질 예정이다. 이를 위해 약 5만명의 자원봉사자가 거리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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