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구급차 안 폭행·폭언 여전…구급대원 보호 개정안 17건 국회서 ‘낮잠’

구급대원 폭행 사망 1년…무엇이 달라졌나

일러스트=나소연

전북 익산소방서의 고(故) 강연희(당시 51세) 소방경이 구급 활동 중 취객의 폭행으로 숨진 지 1년이 지났다. 지난해 4월 강 소방경은 술에 취해 쓰러진 윤모씨를 구급차에 태워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봉변을 당했고, 불면증과 어지럼증을 호소하다 같은 해 5월 1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고 이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소방공무원 폭행 방지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국회는 구조·구급대원 보호를 위한 법률 개정안을 17건이나 쏟아내며 소방공무원의 인권을 강조했지만,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법적 장치는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몸과 마음이 멍든 소방관

“주먹으로 때리고 얼굴을 발로 차는 건 물론이고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대원들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경기 지역에서 구급대원으로 근무하는 김모(28) 소방사는 “대부분의 구급대원이 평균 하루에 한 번은 이런 일을 당한다”고 증언했다. 특히 달리는 구급차 안의 폭행은 속수무책이다. 폐쇄된 공간인 데다 좁아서 돌발 상황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서울소방재난본부 소속 최모(31) 소방교는 “구조한 시민을 병원으로 이송하다 되레 구급대원이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면서 “응급조치 중인 구급대원을 폭행하는 일은 ‘의료진 폭행’과 유사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29일 소방청에 따르면 지난 5년간 구급대원이 시민에게 폭행당한 사건은 총 911건에 이른다. 지난해는 215건의 사건이 접수돼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를 두고 소방공무원들은 “통계 수치가 실제 현장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은애 익산소방서 인화119안전센터장은 “피구조자가 낫이나 칼을 들고 위협하거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 게 대원들에게 일상”이라며 “열에 아홉은 정식 사건으로 처리하지 않고 상황을 수습하는 정도로 그친다”고 말했다. 정은애 센터장은 고 강연희 소방경의 직속상관이었다. 그는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며 “헌법 34조 6항에 명시된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소방공무원을 보호할 방법이 정말 없는 건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119구조·구급에 관한 법률’ 제13조 2항에는 “누구든지 구조·구급활동을 방해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돼 있다. 소방공무원에 대한 폭언과 폭행으로 활동을 방해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된다. 하지만 처벌 수준은 낮다. 5년간 벌어진 구급대원 폭행 피해 사건 가운데 91.4%가 ‘취객의 행패’에서 비롯된 건으로, 현재 수사·재판 중인 사건(321건)을 제외하면 대부분 벌금(282건·47.8%)이나 기소유예(38건·6.4%) 처분을 받았다. 불기소처분도 83건(14.1%)에 이른다. 정 센터장은 “구급대원 폭행에 대한 처벌 수준이 낮은 걸 알고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있다”면서 “대원들이 신고 접수를 하면 ‘그래 봤자 300만원이야, ××들아’라며 조롱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구급대원 보호·소방공무원 복지 필요성은 여야 모두 공감

소방공무원 보호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면 ‘소방기본법’ ‘소방공무원 보건안전 및 복지 기본법’ ‘119구조·구급에 관한 법률’ 등 크게 세 가지 법률을 손봐야 한다. 정부입법지원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4월 사고 이후 약 1년 만에 구조·구급대원 보호를 골자로 한 개정 법률안이 총 17건 발의됐다. 주요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구조·구급활동 방해자 처벌 강화’가 9건(52.9%)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또 구급대원의 자기방어를 위한 분사기, 전자충격기 등 보호 장비 사용을 허가하도록 하거나, 술에 취한 비응급 환자의 119구급차 이송 거부 규정을 명확하게 하는 법안도 제시됐다. 이 밖에 소방공무원의 의료 복지 강화를 위한 ‘소방복합치유센터’ 설립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개정안(3건)과 소방공무원에게 특화된 단체 보험을 제공하는 법안도 올라와 있다.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의원들을 당적에 따라 분류하면 ▲자유한국당 7건 ▲더불어민주당 6건 ▲바른미래당 2건 ▲민주평화당 1건 ▲무소속 1건 등으로 다양하다. 구급대원 보호와 소방공무원 복지에 대한 필요성은 여야(與野)가 모두 공감한 셈이다. 그러나 현재 국회에 발의된 17개 법안은 모두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여야의 정치적 다툼에 휘말려 해당 법안들에 대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소방공무원 폭행 전담하는 수사대 신설

현재 전국 소방서에는 사법권을 부여받은 소방특별사법경찰이 1~2명씩 배치돼 있다. 다만 소방 시설물 관리 등의 업무를 겸하고 있어 폭행 사건에 집중할 수 없는 실정이다. 또 주간 근무로 편성돼 있기 때문에 야간에 자주 발생하는 폭행 사건에 대한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에 서울시는 지난해 7월 전국 최초로 소방공무원에 대한 폭행을 전담하는 ‘119광역수사대’를 신설하고, 소방특별사법경찰이 갖고 있던 구조·구급대원 폭행 사건을 이들에게 전담시켰다.

소방 관계자들이 119광역수사대에 거는 기대는 크다. 문제는 인력 부족. 119광역수사대는 수사대장 1명과 특별사법경찰관 3명, 특별사법경찰관리 3명 등 총 7명이 전부다. 이들이 24시간 3교대로 근무하면서 서울 전역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처리한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지역의 119구급대 출동 건수는 55만9519건이고 이송 환자는 35만3574명에 이른다. 서울119광역수사대는 지난해 월평균 20건의 사건을 처리했다. 정재홍 서울119광역수사대장은 “적극적인 초동 대처를 통해 소방관과 시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력 보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서울 지역에서만 운영 중인 119광역수사대를 전국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전국 5만 소방공무원의 98.8%가 지방직으로, 각 지방자치단체가 자체적으로 소방관 폭행을 전담하는 조직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소방관 국가직 전환 얘기가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서울에서 시행 중인 119광역수사대가 구급대원 폭행 근절을 위한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지만, 재정 상태나 여건에 따라 시행이 어려운 지자체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소방관 국가직 전환만큼이나 중요한 건 대중의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라며 “소방관이 하는 일도 경찰과 똑같이 ‘공무 수행’이므로 구급대원을 폭행할 경우 폭행 혐의에 공무집행방해 혐의까지 더해진다는 사실을 널리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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