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특수학교 세우려면 ‘당근’ 내놔라?… 집단이기주의에 내몰린 아이들

지난 21일 강원 동해 부곡동 동해교육도서관 맞은편 한 아파트 단지에 ‘특수학교반대추진위원회’(반추위)가 만든 현수막이 걸려 있다. 동해교육도서관 운동장 부지에는 동해특수학교(가칭)가 들어설 예정이지만, 반추위는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다.

특수학교를 혐오 시설처럼 여기며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내에 세워지는 것에 반대하는 ‘특수학교 님비’ 현상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 2017년에는 서울 강서구 서진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는 모습이 전파를 타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특수학교 설립이 주민 반대로 차질을 빚는 일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최근에는 주민들이 특수학교 설립 조건으로 지역의 숙원 사업을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는 등 ‘대가성 합의’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 논란이 일고 있다.

‘동해특수학교 결사반대’ 이면엔 “만원 한 장이라도 나와야”

“누구 마음대로 공사를 해. 두고 보자고. 우리는 다 죽는다는 생각으로 싸우니까.”

지난 21일 강원 동해 부곡동 동해교육도서관 운동장에서 만난 김모(여·70)씨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부곡동 주민이자 특수학교반대추진위원회(반추위) 소속 회원인 그는 4년째 특수학교 설립 반대 집회를 주도했다. 이곳 운동장에는 2021년 3월 개교를 목표로 동해특수학교(가칭)가 들어설 예정이다. 최근 시공 업체 선정이 끝나 조만간 첫 삽을 뜨지만, 주민 50여 명으로 구성된 반추위는 “무력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동해특수학교는 2014년 설립 계획이 나왔지만, 주민 반대로 5년간 표류했다. 동해시와 동해교육지원청 등 관계 기관이 반추위와 네 차례 만났는데도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지난해 3월에는 반추위가 설립 부지 지질조사를 저지하려다 몸싸움이 나 주민과 학부모 8명이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반추위 입장은 “무조건 반대”다. ▲소방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거지와 특수학교가 마주해 주민 안전이 위협받고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지역 발전이 더뎌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협상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해시 관계자의 말은 다르다. 임인숙 동해시 문화체육과 주사는 “그쪽(반추위)은 ‘우리는 (요구 사항이) 없다’고 하지만, 교육감과 시장, 시의회의장과 만난 자리에서는 ‘먼저 대안을 가져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말했다”며 “관계기관 회의에서 설득 방안을 마련하고 주민들과 다시 만나 설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형집 반추위 회장은 지난 2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테이블에 앉을 생각이 없다”면서도 “협상을 해도 필요한 걸 제시해야 한다”는 속내를 비쳤다. “노인회관, 어린이집을 지어주겠다는데 그러면 (토지 보상금을)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 받는 문제가 생겨 분란이 인다. 만원 한 장이라도 주면 1원씩이라도 나누지. (노인회관·어린이집은) 어디다 쓰느냐”고 했다.

지자체 차원에서도 ‘당근’을 줘서 주민을 달래자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2월 열린 제285회 동해시의회 업무보고회 회의록을 보면 김기하 의원은 “특수학교가 올해는 어떻게든 마무리돼야 하지 않느냐”며 “수리과학정보체험센터를 다른 지역에 짓지 말고 (특수학교) 인근에 개관해 지역 사람들이 혜택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심재희 동해시 기획감사담당관은 “(강원도)교육청에서 다른 곳을 (부지로) 검토했는데, 동해시에서 강력히 특수학교 근처로 지어 달라고 요청한 상황”이라고 답했다.

최보영 동해시장애인학부모회장은 “특수학교는 장애 학생의 교육권 보장을 위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교육기관인데도 혐오 시설 취급을 당한다”며 “법에 따라 학교 설립을 추진해야 할 당국이 주민에게 휘둘리고, 주민은 설립 대가를 요구하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서울·원주·창원 지역서도 “공짜로는 못 지어”

지역 주민들이 대가를 바라고서 특수학교 설립에 제동을 거는 일은 수년째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2016년 11월 설립 예고 이후 3년여 만인 오는 9월 개교하는 서울 서초구 염곡동 나래학교는 주민들의 ‘종(種) 상향’ 요구로 홍역을 치렀다. 염곡동 일대는 최대 2층까지만 건물을 지을 수 있는 ‘1종 전용주거지역’으로 묶여 있는데, 4층까지 높일 수 있는 ‘1종 일반주거지역’으로 풀어 달라는 것이 골자다. 정순경 전국특수학교학부모협의회 대표는 “주민들은 ‘이참에 종 상향을 이뤄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며 “유력 지역 정치인이 이런 논의를 주도했다”고 전했다. 지역 숙원 사업인 종 상향을 특수학교 설립과 연결해 일괄 타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학교 설립의 고유 권한을 가진 교육감이 특수학교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려 앞장섰다는 점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3월 서울시에 염곡동 종 상향을 검토해 달라고 건의했다. 서울시는 “종 상향과 특수학교 설립은 별개 문제”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주민들은 종 상향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지난해 11월 서울시의회에 출석해 “종 상향은 (강서구 서진학교 논란 당시의) 한방병원보다 더 큰 요구일지도 모르지만, 주민들 모시고 시장님 만나 사정했다”며 “나쁜 선례가 돼 (주민들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특수학교가 오면 혜택도 따라온다’는 생각도 나쁘지 않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있다”고 했다. 특수학교 설립 대가를 요구하는 관행에 문제가 없다는 듯한 취지의 발언이다.

실제로 서진학교와 나래학교의 사례는 다른 지역 특수학교 반대 주민들에게 ‘전범(典範)’으로 통하고 있다. 강원 원주 옛 봉대초등학교 자리에 지어지는 원주특수학교(가칭)가 대표적이다. 설립 계획이 나온 2015년만 해도 반대 여론이 크지 않았지만, 2017년 주민들이 교육청이 소유한 학교 인근 부지의 영구 무상 임대를 요구하면서 공사가 중단됐다. 지난 3월에야 시·도 예산으로 노인회관을 짓고, 마을발전기금을 지원한다는 내용으로 주민들과 가까스로 합의할 수 있었다.

경남 창원 장천동 진해나래울학교도 상황은 비슷하다. 경상남도교육청에 따르면 특수학교 반대 주민들은 ▲마을발전기금 기탁 ▲주민 이주기금 지원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교육부중앙투자심사를 통과하는 대로 시공사 선정 등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지만, 주민들은 비상대책위원회까지 꾸려 반대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지역 주민은 “(보상) 이야기를 안 하면 우리만 손해라는 인식이 있다”며 “(특수학교 설립이) 괜찮다는 주민도 있는데 나서서 말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털어놨다.

김윤태 고려대학교 공공사회학부 교수는 “특수학교 설립에 관한 의사결정권을 교육감·지자체장 등 주민 투표로 선출하는 공무원이 갖고 있는 것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며 “지자체·정치인·시민단체·학자 등이 모두 참여하는 지역 심의기구를 만들어 특수학교 설립을 결정한다면 주민들의 반대나 무리한 요구에도 원칙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장지훈 더나은미래 기자 jangpro@chosun.com]–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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