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시설 벗어나 지역사회로… 중증장애인 행복한 자립 돕는다

시설에서 평생을 지내야 했던 중증장애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최근 들어 중증장애인의 ‘탈(脫)시설’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 탈시설은 장애인이 복지 시설에서 자립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가 국정 과제 중 하나로 ‘중증장애인의 탈시설 지원’을 꼽으면서 시동이 걸렸다. 올해 3월 보건복지부는 장애인들을 지속적으로 돌보기 위한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중심 돌봄)’를 핵심 사업으로 내세우며 ‘커뮤니티 케어 추진단’을 꾸렸다. 서울시도 ‘장애인 자립 생활 지원 5개년(2018~2022) 계획’을 통해 2022년까지 260호의 지원 주택을 짓기로 했다. 장애인 복지 시설들도 변신을 꾀하고 있다. 장애인이 자립을 준비하면서 필요한 돌봄 서비스도 함께 받을 수 있는 ‘커뮤니티’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

네덜란드 알미르 지역에 생길 친환경 스마트팜 공동체 ‘Regen Village’ 개념도. ⓒ푸르메재단

◇다양한 주거 형태 속에서 자립을 체험하다

서울 강남구의 충현복지관은 지난해 12월부터 서울시 시범 사업으로 ‘발달장애인주거생활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장애인이 ‘체험형 주택’에서 자립을 연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곳이다. 센터의 ‘주거 매니저’와 ‘주거 코치’가 발달장애인들이 집을 구하는 것부터 취업 알선, 이웃과의 관계 형성까지 돕는다. 그 결과 지난 1년간 양천구의 체험형 지원 주택에서 생활한 발달장애인 10명 중 6명이 올해 독립했다. 이 밖에도 ‘자기 집’에 살며 주거 지원 서비스를 받는 강남구·양천구 지역 장애인도 24가구에 이른다. 이선영 충현복지관 주거생활지원팀장은 “발달장애인 부모는 자녀가 지원주택에서 사는 모습을 보면서 독립에 대한 우려를 덜고, 당사자는 부모 없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음을 체험할 수 있다”며 “기관이 기존에 운영하는 낮 활동, 취업 연계, 밑반찬과 조식 지원 서비스 등과 연계해 통합 사례 관리를 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지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 교남소망의집은 장애인 개인 특성에 따라 4단계 주거 형태를 지원한다. ▲원내 생활실 ▲여럿이 함께 사는 공동생활 가정(그룹홈) ▲다세대 체험홈 ▲1인 독립 가구 등이다. 이곳 장애인들은 다양한 거주 형태를 체험한 뒤 자신에게 맞는 공간을 찾고, 매일 보던 사회복지사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만나는 식으로 지원 강도를 낮춰보는 훈련을 한다. 매년 3~4명이 이를 통해 임대주택이나 서울시가 지원하는 ‘자립생활주택’으로 독립하고 있다. 시설은 장애인의 자립 과정 전반을 돕는다. 황길자 교남소망의집 부장은 “중증장애인도 단체 생활을 벗어나 일반적인 주거 환경을 누릴 수 있는 지원 주택을 2004년부터 운영해왔다”며 “발달장애 특성상 모두가 시설에서 독립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함께 모여 생활하는 ‘커뮤니티’ 형태의 주거 시설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엔젤스헤이븐 내 도예공방인 ‘지노도예학교’에서 작업 중인 시설 장애인들. ⓒ엔젤스헤이븐

◇스마트팜에서 농사짓고 몸과 마음도 치유해

서울시 은평구에서 30여 년간 장애인 시설을 운영해온 엔젤스헤이븐은 지역 내 거주, 교육, 복지, 직업, 의료, 재활 인프라를 활용해 장애인이 스스로 자립 생활을 할 수 있게 돕는다. 엔젤스헤이븐은 은평구 갈현동 일대에 거주 시설인 은평재활원을 비롯해 은평대영학교(특수학교), 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 서울재활병원 등을 운영한다. 카페와 도예 공방 등 발달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직장도 도보 거리 내에 있다. 조준호 엔젤스헤이븐 상임이사는 “복지 시설이 단순한 수용 기관이라는 인식을 넘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 기관으로 변모해야 할 때”라며 “기관의 서비스 자원을 지역과 공유하고, 장애인과 독거 어르신이 함께 사는 ‘공동체 주택’ 등을 도입해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늘려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존 복지 시설의 개념을 바꾸는 새로운 시도도 진행 중이다. 푸르메재단은 지난 4월부터 경기도 여주 등 수도권 일대에 중증장애인 청년의 자립과 치료를 위한 스마트팜(‘푸르메에코팜’)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컴퓨터와 센서 등 IT로 작물을 재배하는 스마트팜은 발달장애인이 쾌적한 환경에서 농사 활동을 하고 신체적·정신적 치유도 얻는 대안적 복지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유럽에서는 ‘케어팜(돌봄 농장)’이란 이름으로 활성화돼 있다.

발달장애 청년들이 경기도 여주의 한 스마트팜에서 버섯 재배를 체험 중이다. ⓒ푸르메재단

재단은 장애인들이 서울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1~2시간 거리 수도권에 농장을 조성하기로 했다. 또 이곳을 가공·판매 시설, 문화 공간까지 갖춘 ‘복합 커뮤니티’로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정태영 푸르메재단 기획실장은 “네덜란드에는 1100여 개 이상의 케어팜이 있다”면서 “국가에서는 치매 노인이나 장애인 등이 농장에서 일한 시간만큼 돌봄을 받은 것으로 보고 시설에 돌봄 비용을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탈시설 운동은 선진국에 비해서는 뒤늦게 시작된 편이다. 해외에서는 수십년 전부터 정부 주도로 다양한 형태의 장애인 자립 모델을 운영하는 곳이 많다. 영국은 1990년대부터 커뮤니티 케어 관련 법률을 제정, 장애인이 지역사회와 분리되는 대규모 시설이 아닌 ▲케어홈(거주와 일상생활 지원) ▲너싱홈(케어홈에 의료 서비스 추가 지원) ▲서포티드하우징(거주와 필요 서비스 제공) 등 다양한 주거 형태를 지원해왔다. 일본은 장애인과 지역 주민, 의료 관계자, 비영리 단체 등이 회의를 통해 필요한 자원을 연계하는 ‘지역 포괄 케어 시스템’으로 장애인을 돌본다. 정태영 실장은 “민간뿐 아니라 정부와 지역사회가 함께 협력해야 가능한 모델들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탈시설 방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박혜연 더나은미래 기자 hone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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