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진실의 방] ‘혜화동 1번지’를 아시나요?

우리나라 ‘공연예술의 메카’로 불리는 대학로는 서울에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가장 심각한 지역 중 하납니다. 최근 몇 년간 건물 임대료가 지나치게 오르면서 수십년 역사를 가진 극단들이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는 일이 계속되고 있죠.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 조사하던 중 흥미로운 제보를 접했습니다. 바로 ‘혜화동 1번지’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10여 년 전까지 대학로 공연예술계에 몸담았다는 제보자가 기억을 더듬어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대학로의 젠트리피케이션은 2000년대 초 이미 진행 중이었고, 2004년 대학로가 서울시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임대료가 본격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극단들은 건물주와 싸울 엄두도 못 내고 극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이후 대학로에 대자본이 유입되면서 대형극장들이 들어섰고, 영세한 소극장들은 더욱 궁지에 내몰리게 됐다고 합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25년을 버틴 극단이 있으니, 바로 ‘혜화동 1번지’입니다. 1993년 시작된 혜화동 1번지는 5~6명의 연출가가 기수를 이어가며 극장을 물려주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우리 연극계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영향력 있는 연극을 선보이는 단체로 손꼽히죠. 제보자는 “혜화동 1번지가 한자리에서 이토록 오랜 세월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건 ‘건물주의 의지’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건물주 할아버지는 연극에 대해 잘 아는 분은 아니었지만 젊은 연극인들의 열정과 노력을 늘 응원하셨다”며 “다른 극장들이 임대료를 올릴 때에도 저렴한 월세로 연극인들에게 공간을 내줬다”고 떠올렸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건물주야말로 우리 문화예술계의 숨은 공로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부도 답을 찾지 못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해결한 사회 혁신가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정작 주목해야 할 사람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선하고 끈질긴 의지로 어디에선가 세상을 조용히 변화시키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 공치사 없는 선행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 않을까요? 더나은미래가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습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편집장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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