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목)

벤처 필란트로피가 세상을 바꾸는 방법

“재단은 벤처캐피털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지난 1997년, 크리스틴 레츠 하버드대 교수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기고한 글이 비영리 업계에 커다란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의 비영리 지원 프로그램이 큰 기대로 시작해 미미한 임팩트, 애매모호한 전망으로 끝난다. 벤처 투자자는 스타트업 조직이 성장하도록 공들이는데, 재단은 감독관처럼 앉아서 비영리의 사업 효율성만 따진다. 재단과 비영리가 벤처 투자에서 배워야 한다.”

90년대 말, 미국 비영리 업계에서 새로운 흐름이 생겼다. ‘벤처 필란트로피(Venture Philanthropy·이하 벤처 기부)’가 등장한 것. 벤처 기부란 벤처 투자의 기법을 기부에 활용한 방식을 말한다. ▲장기적으로 지원 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기관의 자체 역량을 키우며 ▲금전적 지원 외에 다양한 비(非)재정적 지원까지 하는 ‘전략적 기부’다. 투자 수익을 요구하지 않고, 소셜 벤처뿐만 아니라 비영리단체에도 투자를 한다는 점에서 일반 벤처 투자(VC)나 임팩트 투자와 구별된다.

국내에서도 ‘벤처 기부’가 시작됐다. 2015년 시작된 아산나눔재단의 ‘파트너십온’ 사업과, 김범수 카카오 의장, 김정주 NXC 회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이재웅 다음 창업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등 벤처 1세대 5인방이 2014년 의기투합해 설립한 ‘C프로그램’이 그 주인공이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두 곳 모두 ‘벤처 기부’ 방식으론 국내 선두 주자다. 임팩트 투자와 소셜 벤처에 흘러가는 자금은 많지만, ‘필란트로피’로 향하는 자원은 여전히 부족한 가운데 두 곳은 ‘투자’의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지난 3년, 새로운 투자 방식을 내건 두 기관은 어떻게 생태계를 일궈왔을까. 더나은미래는 아산나눔재단과 C프로그램, 이들과 장기간 협력했던 파트너 기관 5곳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벤처 기부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을 짚었다. 더나은미래에서 국내 ‘벤처 기부’의 시작을 보도했던 세계 벤처 기부 흐름을 보다〈2015년 5월 12일 더나은미래 D3면 특집 기사를 다룬 지 3년 만이다.

◇벤처 기부 ‘양대 산맥’, 조직 성장 돕고 새로운 실험하고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보입니다. ⓒGetty Images Bank

지난 3년, 아산나눔재단 ‘파트너십온’이 집중한 건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는 비영리 조직의 성장(액셀러레이팅)’이다. 파트너십온 사업을 이끌어온 차선주 아산나눔재단 팀장은 “탈북 청소년을 지원하는 단체를 만나 보면, 법무부·교육부·복지부·여가부·미 국무부 등 각기 다른 정부부처로부터 지원받는 사업비로 프로그램을 돌리는 데 급급해 큰 그림을 못 본다”면서 “기존의 민간 지원 방식의 한계를 넘어, 현장에서 문제를 찾고 혁신적인 설루션을 제공하는 비영리 성장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했다. 현장의 비영리단체를 발굴하는 데도 에너지를 쏟는다. 지역에 있거나 사각지대를 메우는 비영리단체가 그물망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다. 전국 5개 도시를 순회하며 사업 설명회를 열고, ‘청소년’ 키워드로 검색에 걸리는 700여 개 단체에 일일이 팩스를 보내 사업을 설명한다.

파트너십온의 지원 금액은 연간 최대 2억원씩 3년. 재정 지원 이상으로 파트너십온이 힘을 쏟는 건 전문가 네트워크다. 선발된 팀은 비즈니스 모델·네트워크 등을 자문하는 ‘자문위원’이나 홍보·재무회계·법무 등 각 분야의 ‘전문위원’과 매월 1회 이상 만나 사업과 운영 고민을 나누고 방향을 다듬는다. 파트너십온 1기에 참여한 7곳 기관(동녘지역아동센터, 드림터치포올, 세상을품은아이들, 세움, 자오나학교, 해솔직업사관학교, 행복한청소년)은 3년간의 지원이 지난해 종료됐다. 지난 3년간 성과는 어떨까. 기관들의 평균 수입(7.2억원)과 평균 기부자(627명) 모두 프로그램 전보다 3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느린학습자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도서를 만드는 ‘피치마켓’의 독서활동 모습. ⓒ피치마켓

반면 1세대 벤처 창업가 5명이 설립한 ‘C프로그램’이 주력해온 건 ‘새로운 실험’의 판을 까는 것이다. ‘다음 세대의 건강한 성장’을 키워드로 새로운 질문을 던져왔다. “동네에 어린이를 위한 미술관이 생기면 어떨까?” 질문에 서울 성동구 금호동에 어린이미술관 ‘헬로우뮤지움’을 열었고, “학교 앞에 어린이 메이커(maker·창작자)가 드나드는 공간이 있다면?” 이 질문에 동대문구 이문동 이문초등학교 앞에 ‘이문238’이라는 아이들의 작업 공간을 만들었다. 청소년이 연구자가 되어 진짜 연구를 이끌어 보기도 하고(고등학자 프로젝트), 주민과 아이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폐쇄된 어린이 공원을 새롭게 변화시켰다(중랑구 세화·상봉 어린이 놀이터). 지난 3년간 C프로그램에서 판을 깔거나 주도했던 실험은 총 35개. 기본적으로 캐피털 콜(필요시 이사회에서 추가 투자) 방식으로 자원을 조달하며, 투자 대상은 개인, 단체(영리·비영리) 혹은 프로젝트별로도 가능하다. 엄윤미 C프로그램 대표는 “지난 3년간 C프로그램의 일은 그동안 없었던 ‘모델’을 실험해보는 것”이었다며 “실험을 이어갈 역량이 있고 합이 맞는 파트너(투자 대상)를 찾는 데 공을 들인다”고 했다.

배움의 공간’ 프로젝트를 통해 공간을 바꾼 구미 봉곡초등학교. 디자인컨설팅회사, 건축사무소, 일러스트레이터 등 전문가가 참여해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공간으로 구현했다. ⓒC프로그램

◇기부에도 전략과 성과 측정이 필요하다

벤처 기부의 가장 큰 특징은 ‘벤처 투자’를 하듯 “전략을 짜고 성과를 측정한다”는 것이다. 벤처 기부 기관은 각각의 프로젝트마다 최종 성과를 설정하고, 그에 맞는 정량·정성 지표를 설정한다. C프로그램이 미래교실네트워크와 설정한 첫해 목표는 ‘반년 안에 단체를 법인화해 지정기부금단체로 등록하기’와 ‘1년간 1000명의 교사 교육하기’. 정찬필 미래교실네트워크 총장은 “당시엔 대충 어림잡은 숫자였는데, 일단 마일스톤(성장 단계별 지표)을 잡고 1년마다 성과를 까다롭게 점검하다 보니 ‘꼭 해야하는 것’이 됐다”고 했다. 다음 해의 핵심은 ‘거꾸로 교실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핵심 역량’을 측정하는 연구 프로젝트였다. 연구 보고서를 통해 두툼한 데이터를 만들고 나서야, 지난해 혜화동에 문을 연 교육 공간 ‘거꾸로 캠퍼스’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임팩트를 측정해 핵심 역량을 갖추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는 “2년 차에 우리는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교사 연수 쪽에 힘을 실으려 했는데, C프로그램이 ‘연구로 가자’고 제안했다”면서 “교육의 임팩트가 데이터로 증명되면서 기부자나 학부모 등 외부에 명확히 소통할 수 있어 장기적으론 임팩트가 더 크다”고 했다.

벤처 기부 기관은 성과를 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2011년 시작된 비영리 교육 봉사 단체 드림터치포올도 아산나눔재단 및 전문위원과 여러 논의를 한 끝에 사업 모델을 다시 변경했다. 지난 2015년, 드림터치포올이 파트너십온 1기로 선정됐을 당시 제안한 아이디어는 ‘온라인 교육 플랫폼’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온라인 교육이 더 많은 학생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재단 측과 다른 위원들은 “드림터치포올의 강점은 그간 면 대 면으로 만나고 교육했던 오프라인에 있다”고 판단했다. 최유강 드림터치포올 대표는 “팀 내부에서 논의했고 그 방향이 맞겠다고 봤다”고 했다.

3년차인 2017년, 드림터치포올은 은평구에 제1호 드림터치센터를 개소했다. 이번엔 최유강 대표가 전문위원을 설득했다. “한 학기에만 봉사자 50명에 운영인력 3명이 투입되는 등 인력 투입이 높은 구조였다. 또 공부의지가 큰 아이들에겐 언제든 올 수 있고 집중적으로 공부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봤다.”(최유강 대표) 드림터치센터에서 1기로 선발한 아이들은 총 21명. 센터에서 공부한 이후, 21명의 평균이 전 과목에서 7~10점 가까이 뛰었다. 지난해부터는 고려대 연구팀과 함께 2020년까지의 드림터치포올 모델의 효과성에 대한 종단 연구도 시작했다. 최 대표는 “아이들을 무조건 입시경쟁에 넣자는 게 아니라 공부 의지가 높지만 여건이 안되는 아이들에겐 기회라도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드림터치센터 모델을 지역사회로 확장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길고, 깊게’… 벤처 기부가 조직을 성장시키는 방식

장기간에 걸친 ‘깊숙한 파트너십’도 벤처 기부의 특징이다. 기본적으로 파트너십온은 비영리단체 1곳에 연간 최대 2억원씩 3년간 지원하는 장기 프로그램이다. 수용자 자녀와 가족을 지원하는 ‘세움’은 파트너십온의 1기로 선정된 단체다. 이경림 세움 상임이사는 “3년이라는 장기적인 시간을 두고 조직을 탄탄하게 만들기 위해 함께 고민했다”면서 “당시 창업 초기라 실무자도 수용자 자녀를 처음 접하고 전국에 수용자 자녀가 얼마나 있는지 등 지표도 없었는데, 아산과의 적응 기간을 1년가량 충분히 가지면서 현장에서 진짜 필요한 것들을 먼저 준비할 수 있었다”고 했다.

투자 파트너의 신뢰 덕분일까. 세움은 우리나라 최초로 지난해 사단법인 ‘두루’와 협력해 ‘수용자 자녀 인권 상황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여주의 소망교도소에 국내 최초로 ‘아동친화적 가족접견실’도 개소했고, 앞으로 법무부와 협력해 전국 5개 교도소로 확대할 예정이다. ‘수용자 자녀 지원 가이드북’을 발간하고 통합적 정서 지원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단계별 지표도 마련했다. 설립 때만 해도 158명이었던 개인 후원자가 이제는 한 해 300명까지 늘었다. 이 상임이사는 “한번은 아산 측에서 예산을 보더니 ‘교도소에 다니고 아이들을 지원하려면 차가 필요할 것 같고, 차량 모델도 소형보단 대형이 낫겠다’고 말해, 사회복지 실무자로서 놀랐다”며 “2년 차부터는 사회성과연계채권(SIB) 모델, 개인 후원자 발굴, 재단 지원 등 어떤 출구 전략이 맞을지에 대해서도 논의를 거듭했다”고 했다.

파트너십온의 또 다른 특징은 ‘조직과 개인의 성장에 투자한다’는 것. 지원금을 ‘사업비에만 써야 한다’는 식의 꼬리표는 없다.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뉴미디어 예술 대안학교 ‘꿈이룸학교’의 정두수 사무국장은 프랑스와 영국에 있는 ‘뉴미디어 대안학교’에 3개월 체험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조직의 기틀도 다졌다. 정 사무국장은 “비영리 조직의 지속 가능성을 컨설팅하는 알트랩과 함께 임금 규정, 취업 규칙 등 조직으로서 기본적인 제도들을 갖췄다”며 “다들 지쳐서 너나없이 퇴사를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파트너십 전문위원 교수님이 오셔서 밥도 사주시고, 조직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응원을 보내주셔서 그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고 했다.

‘헬로우뮤지움’은 C프로그램이 장기간에 걸쳐 깊숙하게 관여했던 사례다. 지난 2014년, 엄윤미 C프로그램 대표가 서울 역삼동에 있던 헬로우뮤지움 문을 먼저 두드렸다. 김이삭 헬로우뮤지움 관장과 수개월간의 논의 끝에 문화 예술 자원이 적은 지역의 아이들을 위해 ‘동네 미술관’을 만들기로 했다. 이정빈 헬로우뮤지움 교육팀장은 “처음엔 이런 지원을 받아도 될지 직원들도 고민이 많았는데, ‘콘텐츠 기획은 헬로우뮤지움에서 알아서 하시라’고 했다”고 말했다. C프로그램에서는 ‘조직 워크숍’, CFO 채용 등 헬로우뮤지엄이 기반을 갖추는 데에도 도움을 줬다.

4년간의 긴 시간 동안 정성·정량 성과도 만들어졌다. 이 팀장은 “조직이 안정되면서 1년치 기획이 미리 진행될 정도로 콘텐츠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면서 “이전처럼 지쳐서 퇴사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고 했다. 정량적인 지표를 잡는 데도 익숙해졌다. 그는 “처음엔 ‘수치로 활동의 가치를 설명할 수 없다’는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고객 정보나 체류 시간 등 데이터를 축적하면서 운영 및 기획 역량도 늘었다”고 했다. 헬로우뮤지움은 지난해 관객이 처음으로 1만명을 넘었고, 자체 수익이 전체 운영비의 25%까지 올랐다. ‘출구 전략’으로 잡은 목표치는 자체 수익이 50%가 되는 것이다. 엄 대표는 “동네 미술관은 후원금 없이 운영되긴 어렵지만, 최소한 자체 수익을 어느 정도 끌어올릴 수 있는지 실험 중”이라면서 “지속 가능한 비영리단체를 운영하기 위해 후원금과 자체 수익의 비율을 조정하는 모델링 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어린이미술관 ‘헬로우뮤지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예술을 전달하는 ‘동네미술관’이다. 오는 7월 7일까지 <#Nowar>를 주제로 진행중인 이번 전시회에선 어린이의 시각에서 전쟁과 평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기획했다. ⓒ헬로우뮤지움

◇벤처 기부 그 후… 앞으로의 고민은?

올해로 4년 차를 맞은 파트너십온과 C프로그램의 ‘벤처 기부’. 이들의 고민은 무엇일까. 차선주 아산나눔재단 팀장은 단연 “프로그램 지원이 끝나고 난 이후”라고 했다. 파트너십온 혁신파트너로 선정되는 모든 단체는 2년 차부터 개인 후원자 증대, 재단 투자, 수익 사업, 법제를 개편해 제도권 예산으로 들어가는 총 4가지 방식을 중심에 두고 ‘출구 전략’을 고민한다. 하지만 3년 안에 재정적으로 완전히 독립하는 비영리단체는 여전히 드물다. 차 팀장은 대안으로 “해외의 벤처 기부 기관과 국내 단체 사이에 자원을 연결할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비영리’ 방식으로라야 해결할 수 있는 사회문제도 있다”면서 “초기 투자, 액셀러레이팅, 성장 투자 등 비영리 생태계 내에 다양한 단계를 지원하는 ‘자원의 파이프라인’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C프로그램의 올해 키워드는 ‘실험의 확산’. 그동안 새로운 모델 실험을 이어왔다면, 그중 어떤 모델이 확산 가능할지, 파트너끼리의 협력은 어떻게 구조화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올해 초, 혜화의 옛 샘터 건물을 개조한 ‘공공일호’에 ‘러닝랩’을 연 것도 그간 쌓아온 실험과 콘텐츠를 외부에 알리기 위해서다. 엄 대표는 “지금까지 C프로그램이 ‘다음 세대의 건강한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두고 새로운 방식으로 돈을 쓰는 실험을 해왔다면, 앞으로는 더 많은 자원을 연결하며 생태계에서 필요한 역할을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주선영·박혜연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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